실업급여로 번 시간 허투루 쓰지 않기[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1일 2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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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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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실제로 겪어봐야만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 솔직히 직장인 시절에는 실업급여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가끔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보험료를 보면 심기만 불편해질 뿐이었다. 고용보험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고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하지만 직접 받아 보니 생각했던 바와는 매우 달랐다. 실업급여는 그냥 그런 보험 혜택이 아니었다. 특히 퇴직자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만약 수십 년 직장 생활을 마친 퇴직자가 실업급여를 받게 된다면, 나와 같이 다음의 세 가지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첫째, 실업급여 수급액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내가 갑작스러운 퇴직 후 가장 먼저 했던 것은 나의 재무 상태를 살피는 일이었다. 그만큼 경제적 문제가 걱정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아무리 끌어모아도 퇴직 후 삶을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국민연금은 아직 멀었는데 당장 받게 될 실업급여 금액은 예상보다 너무 적었다. 근 30년을 냈건만 고작 이 정도라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믿을 구석이라곤, 퇴직하면 돈 쓸 데가 없어진다는 선배들의 위로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과는 다르게 암만 애를 써도 퇴직 후 생활비를 낮추기란 어려웠다. 보험료 같은 고정비부터 의료비, 경조사비 등 예측치 못한 비용까지 월말에 계산기를 눌러 보면 한숨만 나왔다. 통장 잔액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여차하면 잔액이 금세 바닥날 지경이었다. 이처럼 근심만 쌓이는 상태에서 실업급여는 고마운 단비와도 같았다. 한 푼이 아쉬운 퇴직자에게 4주마다 나오는 180만 원가량은 결단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면 돈의 크기도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실업급여를 받는 날이면 부자라도 된 심정이었다.

둘째,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은 절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내 경우는 총 270일 치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계절이 세 번 바뀌는 세월이니 처음에는 길다고 여겨졌다. 딱히 묶여 있는 곳도 없어 직장인 때보다 한결 넉넉하게 시간 사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친구들도 만나고 미뤄 뒀던 일도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눈만 감았다 뜨면 날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실업급여 수급 횟수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데 내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초반의 여유는 조급함으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 더 자주 이력서를 내고 더 많은 취업 강좌를 들었지만 이렇다 할 결실은 없었다. 자신만의 강점이 없는 보통의 퇴직자가 회사 밖에서 자리를 잡기에 270일이란 기간은 지나치게 모자랐다. 그제야 늦장을 부리며 초기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이미 수급 종료 시기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셋째, 실업급여를 놀면서 받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퇴직 동료 하나가 실업급여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고 했었다. 고용센터에 몇 번 방문하고 인터넷으로 클릭만 하면 끝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센터에서 교육을 받는데도 담당자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직원이 여러 차례 강조했던 구직 활동에 대해서도 흘려들었다. 그보다는 제때 과제를 해치운 후 다른 일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결국, 세상에 공짜란 없었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필수 과목 이수는 물론이고 주기적으로 재취업 활동도 해야 했다. 동료에게 듣던 것보다 난이도가 꽤 높았다. 무엇보다 힘든 점은 직장 밖에서의 내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두드렸던 기업의 문이 한 군데도 열리지 않는 현실 앞에서 적잖이 당황했다. 일단은 변해야 한다는 결심으로 이후 구직 활동 외에 다른 노력도 함께 했으니 실업급여는 내게 취직 이상의 성과를 안겨준 것과 다름없다.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은 실업급여를 ‘시럽급여’라고 한다. 누군가는 회사도 안 나가고 일도 안 하는데 180만 원의 돈을 정부가 주니 횡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퇴직자 상황에서 겪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실업 기간 반복해서 겪는 취업 거절로 인해 세상의 쓴맛만 보게 될 뿐이었다. 여기에 실업급여가 끝나면 진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더해졌다.

정해진 실업급여 일정이 끝나가는 시점에 내가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바로 내가 받은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장년 퇴직자가 얻을 수 있는 일자리 대부분이 최저시급임을 고려하면, 거의 한 달 간격으로 새로운 준비를 할 수 있는 180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이를 알고서도,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쓸 사람이 있을까. 그러니 부디 실업급여 기간을 잘 활용하셨으면 좋겠다.
#실업급여#시간#고용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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