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철중]왜곡된 ‘팬덤’에 칼 빼든 중국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1일 23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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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중 베이징 특파원
김철중 베이징 특파원

지난달 3일(현지 시간) 파리 올림픽 여자 탁구 결승전에 나란히 오른 중국의 천멍(陳夢)과 쑨잉사(孫穎莎). 자국 선수 2명이 금·은 메달 색깔을 가리는 모습을 자랑스럽고 편안하게 지켜볼 만도 한데, 이날 중국 관중들은 달랐다. 경기 내내 쑨잉사에게 일방적 응원이 쏟아졌고, 접전 끝에 천멍이 승리하자 중국 관중들은 환호가 아닌 야유를 보냈다. 국제 대회,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서 자국 선수에게 손가락 욕까지 하는 모습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중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 중 하나로 꼽히는 쑨잉사의 팬들이 ‘쑨잉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며 천멍에게 무차별 폭격을 가한 것이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이번 사태의 배후로 ‘팬덤(fandom) 문화’를 지목했다. 중국어에서는 팬덤을 ‘판취안(飯圈·반권)’이라고 한다. 중국식 병음이 ‘fan’인 ‘飯(밥 반)’과 ‘범위·무리’를 뜻하는 ‘圈(우리 권)’이 합쳐진 신조어다. 직역하면 ‘밥 모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밥 먹듯이 ‘덕질(특정 대상에 심취해 빠져드는 행위)’을 한다는 건 팬클럽을 표현하는 절묘한 단어다. 중국에서는 스포츠 스타들이 연예인 못지않은 강성 팬덤을 거느리는 경우가 많다.


자국 선수마저 야유하는 왜곡된 팬심

문제는 팬덤이 동경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에 대한 무분별한 비방으로 이어진다는 것. ‘샤오펀훙(小粉紅·극단적 애국주의)’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조국을 ‘아중거(阿中哥·중국 형님 또는 오빠)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하지만 해외 기업이나 인물, 심지어 자국 인사가 중국을 비판하거나 무시했다고 여기면 맹목적인 비난을 쏟아낸다. 서방 매체들은 중국 정부가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샤오펀훙의 선동 활동을 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런 서방의 비판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대한 공격에는 중국 정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와 내부 단합 극대화를 위해 샤오펀훙을 묵인해 왔다면, 이번에는 스포츠 팬덤이 올림픽 기간 중 단합을 훼손하고,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안 당국은 곧바로 천멍과 대표팀 코치에 대해 악의적인 글을 올린 20대 여성을 체포했다. 또 소셜미디어(SNS) 플랫폼들은 선수를 비방한 계정 6000여 개를 차단했다. 국가체육총국은 올림픽 폐회 약 보름 뒤인 지난달 28일 긴급회의를 열고 “팬덤에 대한 시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체육총국은 선수 보호와 국가 스포츠 발전에 해가 된다고 지적했다.


‘사회 통합’에 문제 될 것 우려해 ‘강경 대응’

파리 올림픽 기간에 나타난 왜곡된 팬덤을 향해 중국이 내놓은 해법은 강력한 처벌이다. 관영 중국중앙(CC)TV는 논평을 통해 “고질병에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관영 매체들은 팬덤 뒤에 상업적 시스템이 도사리고 있다며 업계에 대한 규제도 사실상 예고했다. 체육계는 선수들에게 팬덤 관련 활동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일부 선수는 스스로 팬클럽을 해체했다.

한국에서도 왜곡된 팬덤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국에서 ‘연예계 정풍(整風)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중국 매체들이 ‘팬클럽 문화의 원조가 한국’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여전히 국내 연예인들의 사건 사고 때마다 팬들 안팎에서 상호 비방전이 이어진다. 정치권에서도 팬덤으로 인한 부작용이 적잖게 발생하고 있다. 중국의 표현대로 ‘팬덤’ 원조인 우리는 왜곡된 팬덤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순수한 팬심을 자극해 경제적 이득을 과도하게 챙기지는 않는지, 다른 목적으로 팬덤을 악용하진 않는지도 살펴야겠다.

#중국#정부#파리 올림픽#여자 탁구#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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