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인구 위기’ 佛 대형 서점의 실험
佛 대형 서점 프낙의 첫 카페형 서점… 자존심 버리고 미국식 커피 판매
프낙, 샹젤리제 지점 적자로 폐점해… 한 지방 서점은 4만여 권 폐기 처분
청소년 하루 평균 19분 독서 심각… 지방 소형 서점 위주로 부활 노려
《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북역에 있는 서점 ‘프낙’. 이날 방문한 프낙의 책장에는 동화와 소설, 만화 등 다양한 책이 진열돼 있었다. 여행 배낭을 멘 학생부터 양복을 입은 점잖은 인상의 백발 신사까지 다양한 이들이 책을 읽고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서점 한쪽에 크게 자리 잡은 ‘프낙 카페’였다. 커피와 샌드위치 등 간식은 물론 맥주 같은 주류도 판매했다. 파리 거리에서 흔히 접하는 따뜻한 에스프레소만 고집하는 기존 카페들과 달리 미국식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메뉴에 포함된 점도 인상적인 부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을 충전할 콘센트가 설치됐고, 앉은 자리에서 통유리를 통해 기차 출발 시간을 알리는 대형 전광판이 보이도록 꾸민 점도 프랑스의 일반적인 카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7월 8일 문을 연 이 매장은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최대 서점 체인인 프낙의 첫 ‘카페형 서점’이다. 카페형 서점은 미국이나 한국에선 이미 익숙한 풍경이지만, 서점 고유의 정체성을 중시해 온 프랑스에선 어색한 조합이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는 그간 서점은 ‘서점답게’ 전통적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대형 서점과 소형 소점을 막론하고 프낙처럼 카페형 서점을 운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파리 시민들도 프낙의 실용적이고 현대화된 시스템 도입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1500㎡ 크기의 프낙 카페 한쪽에 놓인 좌석 약 40개는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카페를 찾는 이가 늘자 직원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고객들에게 “테이블을 함께 써도 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안 기유 씨는 “앉을 공간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휴식을 취하면서 책을 고르게 된다”며 “매우 실용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 프낙 샹젤리제 매장, 올해 말 폐점
프낙은 첫 카페형 서점을 열며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단 카페 외에 편의점도 ‘동거’ 중이다. 2층 프낙 카페를 가려면 아래층 편의점을 지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역에서 많은 여행객이 찾는 편의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점 고객도 많이 유입시키려는 취지다.
파리 북역은 영국과 벨기에, 독일 등 유럽 이웃 국가들로 향하는 기차가 모이는 장소로 하루 평균 70만 명이 이용하는 곳이다. 프낙 측은 카페형 매장을 연 계기에 대해 “고객에게 문화와 기술적인 요소를 접할 수 있는 즐거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프낙이 이런 도전적 실험에 나선 것은 최근 프랑스도 독서 인구가 크게 줄며 서점들이 큰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프낙의 대표 점포였던 샹젤리제 거리 서점은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가 결국 올해 말 문을 닫기로 했다. 샹젤리제 거리에 명품 매장들이 늘며 고정비용인 임차료는 오르는데 매출은 지속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프낙은 최근 폐점 계획을 발표하며 “수년간 심각한 적자에 시달렸다”며 “대신 매장 직원 101명은 다른 프낙 매장에 배치돼 고용이 100% 유지된다”고 밝혔다.
프낙을 운영하는 프낙다르티그룹은 프랑스와 스페인, 벨기에 등 12개국에서 1000개가 넘는 매장을 가지고 있다. 채용 직원 규모만 2만5000명에 이른다. 경영진은 최근 10여 년간 독서 인구의 급격한 감소 등 환경 변화가 심각해지자 다양한 시도에 나서고 있다. 2011년엔 디지털 도서를 열람할 수 있는 ‘코보 e리더’를 선보였으며, 2016년에는 전자 제품 프랜차이즈인 다르티와의 합병을 공식화했다. 카페형 서점 역시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 독서 인구 감소, 고물가 영향
‘서점의 위기’는 이미 프랑스 전역에서 감지되고 있다. 프랑스 동남부 알프마리팀주의 생로랑뒤바르에 있는 ‘그랑 서점’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랑 서점은 프랑스 지방에서 손꼽히는 대형 서점이었으나, 심각한 경영난으로 개점 2년 만에 폐업했다. 지역 일간지 라데페슈에 따르면 해당 서점은 1300㎡ 규모를 갖춘 채 도서 4만3000권을 소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파산을 맞아 당장 건물을 비워 줘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4만3000권의 책을 처분하지 못했고, 책들을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는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으며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서점연합(SLF)에 따르면 프랑스엔 현재 독립 서점이 약 3700개 있다. 시장조사전문업체 제르피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서점의 평균 순이익은 2022년 기준 매출의 약 1.1%일 정도로 처참하다. 제르피 관계자는“서점업은 소매업 가운데 가장 수익성이 낮은 업종 중 하나가 됐다”고 말했다.
서점의 경영난은 기본적으로 독서 인구는 감소하고 영상 시청 인구는 증가하는 시대상이 반영된 탓이다. 여기에 심각한 고물가가 지속되며 임차료나 운송비 등도 대폭 상승해 서점들의 부담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특히 학생들의 독서량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 서점 운영에 큰 타격을 입힌 주범으로 꼽힌다. 사실 프랑스 학생들의 독서량은 유럽 국가들 기준으로 저조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가파르게 줄어드는 추세다. 국립도서센터(CNL)와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올해 4월 발표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16∼19세 청소년 가운데 ‘여가 시간에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응답이 3분의 1에 이르렀다. 프랑스 청소년들은 책을 읽는 데 하루 평균 19분을 소비하는 반면, 전자기기 화면(전자책, 오디오북 제외)을 보는 데는 3시간 11분을 쓰고 있다. 레진 아숑도 CNL 회장은 “독서는 집중력과 상상력, 공감을 키우는 데 핵심적 요소”라며 “어린이와 청소년 독서를 진작시키기 위한 인식의 대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중소도시 서점은 오히려 늘어
프랑스 서점 업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비관적인 면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의외로 프랑스 전역에서 새로 문을 여는 서점 수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CNL에 따르면 2022년 서점 142곳이 창업했는데, 이는 전년에 비해 소폭 늘어난 것이다.
프랑스 서점 증가는 다름 아닌 농촌 및 해안 등 지방 서점의 증가 때문이다. CNL은 “2017년 이후 문을 연 서점의 절반은 주민이 1만5000명 미만인 도시에서 생겼다”며 “지방에선 서점을 점차 (소외된) 지역 서비스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추세”라고 소개했다.
특히 최근 정부와 서점업계가 힘을 모은 독서 캠페인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CNL과 프랑스 교육부는 ‘3월 10일 독서를 하자’는 캠페인을 벌여 하루 15분만이라도 독서를 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려 애쓰고 있다. CNL과 중앙 및 지방 정부는 서점들을 대상으로 5년간의 투자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독립 서점의 날’도 25년 전부터 지정됐다. 서점과 출판사들은 매번 국제적인 행사를 열어 독서 인구를 늘리는 데 힘쓰고 있다.
1981년부터 시행해 온 ‘도서 가격 할인 5% 이상 금지’ 조치가 대형 도서유통업체의 지배를 막아 주는 방패가 되고 있단 평가도 있다. 아마존 등 대형 온라인 업체들도 책을 더 많이 할인해 팔 수 없는 구조가 소형 서점의 살길을 터줬다는 것.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봉쇄 기간이던 2020년 11월 정부가 서점들에 우편 발송 비용을 지원한 것도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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