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 회장은 아이폰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고 한다. 25년 후 ‘아이폰’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1921년 탄생한 프랑스산 샴페인 ‘돔 페리뇽’은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이유였다. 아르노 회장의 이 한마디에는 기업이 헤리티지(유산)를 어떻게 경영에 활용해야 하는지 단순 명료하게 담겨 있다.
모든 기업에는 스토리가 있다
헤리티지는 무형의 자산이다. 월트디즈니가 1957년 지식재산권(IP) 기반의 사업 확장 계획을 종이에 그린 ‘디즈니 시너지 맵’은 기업 정체성을 상징한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1998년 구글 검색엔진을 만든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허름한 차고는 스타트업 정신 그 자체가 됐다. 1960년대 후반 플로리다대 풋볼팀 ‘게이터스’가 게토레이를 마시고 승승장구해 우승까지 차지했다는 스토리는 과학적 증거를 떠나 제품에 긍정적 이미지를 더했다.
기업은 본래 자기 자본은 물론 남에게 빚을 지면서까지 재화를 확보해 부가가치를 만들어낸다. 결국 기업이 고유의 헤리티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은 주머니 속 비즈니스 자산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30대 그룹의 마케팅·전략 담당 임원들에게 한국 기업이 실제 가치에 비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묻자 ‘저평가’라고 답한 비율이 80%에 가까웠다(30명 중 23명).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하게 맞붙는 세계 무대에서 기업 스스로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 이유를 적은 답변 중 하나는 이랬다.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조직문화와 브랜드 이미지가 별개인 경우가 많다. ‘역사에 대한 존중’과 ‘미래를 위한 혁신’을 동시에 좇으면서, 그 둘을 잇는 ‘헤리티지의 끈끈함’은 무시하는 편이라고 느낀다.”
헤리티지 활용이 서툴다고 기업 및 브랜드 가치가 낮아진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기업 가치라는 게 많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매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헤리티지가 기업 가치를 올릴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가 될 수는 있다. 기업 경쟁력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면 헤리티지가 필수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글로벌 1위 브랜드 애플이 ‘단순함’이라는 잡스의 디자인 철학을 고집스럽게 계승하는 게 바로 그런 배경에서가 아닐까. 독일 메르세데스벤츠가 자체 박물관에 130여 년간 만들어온 차량을 모두 전시하고, 현대자동차가 1970년대 첫선을 보인 포니를 50년 만에 복원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장수 기업일수록 써먹을 재료가 많은 건 사실이다. 오랜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깊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들이 축적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헤리티지를 100년 기업만의 전유물로 여겨선 곤란하다. 1921년생 디즈니에 시너지 맵이 있는 것처럼 갓 서른이 된 1994년생 아마존 역시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휴지에 휘갈긴 ‘플라이 휠’을 떠올릴 수 있으니 말이다.
헤리티지도 잘 써야 가치가 빛난다
헤리티지의 실질적 가치는 결국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느냐’보단 ‘어떻게 잘 쓰느냐’에 달려 있다. 사사(社史) 속에 꽁꽁 숨겨둔 유산은 ‘기록’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 테다.
한국의 대표 기업들은 최근 10년간 빠르게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어느덧 3세 경영자가 그룹을 대표하는 곳이 많아졌고, 일부 기업은 4세 경영으로까지 넘어가는 단계다. 충분한 업력과 그에 따른 유산들이 쌓였다는 얘기다.
이제 그 유산들을 세계 무대에 꺼내 놓을 때가 됐다. 한국만의 정체성, 그리고 거기에 뿌리를 둔 한국 기업만의 독특한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글로벌 스타를 만들어낼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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