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총수들은 추석에도 마음이 가볍지 않을 것 같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대표 등은 19일부터 윤석열 대통령의 체코 공식방문길에 경제사절단으로 함께 떠난다. 4월 총선 참패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용산과 재계의 ‘원팀’ 해외 여정이 재개된 셈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던 걸로 전해진다. 대한상의는 8월 중순 1차로 참가 기업을 모집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원찮았다. 경제사절단 주관단체인 대한상의 회장 자격으로 당연히 참가해야 하는 최 회장을 제외하곤 나머지 총수들 모두 처음엔 참가를 주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전자나 LG전자는 체코에 공장도 없고 판매 지점만 두고 있다. 이번 대통령 방문 때 맞춰 발표할 투자나 협력 방안 등 ‘선물 보따리’가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다. 현대차는 체코에 공장이 있지만 그 시기 정 회장의 주요 일정이 잡혀 있었다. 8월 올림픽 선수단 격려에 이어 9월 체코 방문 행사에 잇달아 참석하는 게 일면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총수들의 참여가 저조하자 대한상의는 모집 기간을 늘렸다. 기업들은 결국 출국 3주 전까지 “삼성은 가는지, 현대차는 가는지” 치열한 눈치싸움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 재계 관계자는 “불참 의사를 이미 밝혔는데도 용산에서 ‘일정에 무리 안 가는 선에서 가급적 4대 그룹 총수는 참석해 달라’고 메시지가 왔다”고 귀띔했다.
이 회장은 매년 추석 연휴에 해외 사업장을 찾아 임직원을 직접 격려하고 현장을 점검해 왔다. 이번에도 사전에 한 곳을 정해 준비해 왔지만 체코 방문에 동행하기로 최종 결정하면서 방문지를 급히 변경했다. 다른 총수들도 기존 일정들을 모두 미루고 방문 준비에 돌입해야 했다.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몇 주, 혹은 몇 달 전부터 준비했을 최고경영진 보고를 갑자기 늦춰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방문 성격에 맞춰 갑자기 관련 사업 현황과 사회공헌 내역 등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기업 입장에서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수개월 전부터 해외 고객사 경영진과 조율해 잡힌 미팅 일정을 직전에 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통령 행사 참석을 위해 서너 주 뒤, 때로는 바로 다음 주 잡혀 있던 미팅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것을 미국과 유럽의 최고경영자들은 보통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해 경기 침체의 늪 속에서도 총수들은 윤 대통령의 숱한 해외 순방 일정에 함께했다. 연말에는 부산 엑스포 위로 행사에서 그 유명한 ‘총수 떡볶이 먹방’도 남겼다. 경제 위기를 함께 헤쳐 나가기 위한 민관의 원팀 정신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국내에선 주요국 어디에도 없는 주주 충실 의무 법제화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하면서, 해외에서 함께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행사를 연다고 갑자기 원팀이 되긴 어렵다.
‘팀’에 대해 국어사전을 찾아봤더니 ‘같은 일에 종사하는 한동아리의 사람’으로 정의돼 있었다.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부여받는 동시에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지원하며 협업하는 조직을 뜻할 것이다. 2년간 용산과 총수들이 보여준 원팀은 과연 이 정의에 들어맞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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