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정확하게는 ‘교실’을 좋아한다. 교실 공간 특유의 정감 어린 분위기가 아련하게 애틋하다. 매년 각종 자격시험을 빌미로 내 것도 아니었던 교실을 찾으며 때아닌 위로를 받곤 한다. 그 교실 안에서도 나를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시간표’.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한국사, 음악, 미술, 체육, ‘체험활동’까지…. 과목명을 읊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업무 특성도 있겠지만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끝이 없다. 경제금융, 재무회계, 상법, 기술 트렌드 등. 결코 ‘좋아한다’ 말할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일들이 있다. 그뿐인가. 밥벌이에 하등 도움은 안 되지만 배우고 싶은 것들 역시 여전히 많다. 누군가처럼 멋지게 클래식 도입부만 듣고도 작곡가를 맞히고 싶고, 대화 중 ‘연도’ 이야기가 나오면 그 시기 주요한 역사적 사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떠올리고 싶다. 소설 작법도 배우고 싶고, 영화도 더 전문적으로 보고 싶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마음’만 두서없이 흘러넘칠 뿐, 실상은 매일의 부족함을 임기응변으로 채워 나가기에 바쁘다. 그 옛날 교실처럼 ‘누가 시간표 짜서 수업 좀 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유다.
시간표를 짜 줄 사람도, 나서서 떠먹여 줄 사람도 없다. 다만 출근 시간보다 2시간 일찍, 오전 7시에 카페에 가기 시작했다. 7시 반 정도까지는 경제지를 훑고, 이어 출근 전까지는 공부를 한다. 여러 ‘과목’을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므로 나름의 ‘학기제’ 운영을 하고 있다. 한동안은 영어 공부를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부이기에, 영어 경제 뉴스 교재를 한 권 정해서 본문을 외웠다. 이어서 한동안은 재무회계 공부를 했다. 마음 맞는 교재를 골라 2회독을 했다. 너무 ‘필요’한 공부만 하다 보니 삶이 퍽퍽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30분 정도는 ‘교양’ 과목을 추가하기로 했다. 영화서와 미술서 중 고민하는 이 시간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시간이 쌓이면 들리지 않던 단어가 들리고 눈에 들어오지 않던 숫자가 읽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몰랐던 세계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에 대한 ‘리터러시(literacy)’가 생길 때, 말 그대로 시야가 넓어지는 것을 체감한다. 그때의 쾌감이 그 무엇보다도 좋다.
오늘도 오전 7시, 백팩을 둘러메고 등교를 한다. 교사도, 학생도 오로지 나 혼자인, ‘혼자의 교실’로.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교재와 필통을 꺼낸다. 수업료는 단지 커피 한 잔. “따듯한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먹고 갈게요!” “디카페인은 안 하세요?” 그 시절처럼 서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간식을 나눠 먹을 학우는 없지만, 시간이 쌓이는 만큼 눈인사도 쌓여 취향을 기억해 주는 점원이 생겼다. 완독한 교재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음 ‘학기’의 시간표를 짠다. 좋아하는 일을 위해 싫어했던 일을 좋아하는 훈련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보상을 적절히 배치해서. 시험도, 성적표도 없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오래전 그 교실이 그랬듯, 이 교실이 나를 또 키우고 지켜낼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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