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사는 게 막막할 땐 시장에 간다. 빈 장바구니 하나 들고서 털레털레. 오래된 동네에 동그랗게 파놓은 굴속 같은 시장에는 온갖 푸르싱싱한 것들과 맛깔스러운 냄새와 부대끼는 소란과 억척스러운 활력이, 터질 듯이 꽉 들어차 있다.
채소 장수, 과일 장수, 생선 장수, 호떡 장수, 국밥 장수들이 좌판마다 평생 팔아온 것을 알알이 겹겹이 늘어놓는다. 할머니 손에 끌려가는 어린애처럼 가지각색 맛깔스러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선 시간이 휘 지나간다. 어렸을 땐 시장 상인을 부르는 ‘장수’라는 말이 무지막지 힘이 센 ‘장수’인 줄만 알았다. 배추 단을 척척 이고, 생선 궤짝을 착착 쌓고, 가마솥을 휘휘 젓는, 마고 할미처럼 억척스럽고 힘센 할머니 장수들은 어찌나 수완도 좋은지. 늘 내 마음을 다짜고짜 움켜잡는다. 요즘 이게 제철이야. 오늘은 이게 좋아. 나 평생 이것만 지었어. 개중에 빛나고 좋은 것들만 골라 장바구니에 한 움큼씩 넣어준다. 빈속처럼 텅 비었던 장바구니가 어느새 둥글고 오돌토돌하고 싱싱하고 뜨거운 것들로 묵직해졌을 땐, 시름시름 앓던 마음 같은 건 깜빡 까먹어 버린다. 맛있는 거 해 먹어야지! 단순한 바람이 오늘 치 기쁨으로 남는다.
살다가 칭찬받고 싶을 때도 시장에 간다. 태권도 도복을 입은 쌍둥이 형제를 데리고 시장에 가면 아들내미만 둘이야? 쌍둥이야? 이만치 키우느라 고생했네. 참말로 장하네. 쫄래쫄래 날 따라오는 아이들 뒤로 쫄래쫄래 칭찬들이 따라온다. 그게 어찌나 뿌듯한지.
단골 국밥집에 들렀다. 육개장 4인분에 1만3000원. 요즘 물가엔 말도 안 되게 싼 데다 푸짐하고 맛있어서 든든한 일용할 양식이 된다. 국밥 장수 할머니가 늦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한소끔 식혀둔 육개장을 퍼주었다. 구경하는 아이들을 보더니 할머니가 말했다. “어유, 고생했네. 나도 아들만 둘 키웠는데 힘에 부쳐도 크면은 든든해. 뚝뚝해서 재미는 좀 없지만.” 아드님 나이를 묻자 첫째가 58세란다. 어림잡아도 할머닌 70대 후반일 터. 전혀 그 연세로 안 보인다니까 할머니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여기서 50년을 국밥 장사로만 애들 키워 장가보냈어. 근데 만날 장사한다고 애들을 못 봐서 사이가 살갑지가 않아. 평생 미안하지. 애기 엄만 힘들어도 애들이랑 맛있는 거 해 먹고 시간 많이 보내. 언제 다 키우나 싶어도 눈 깜짝할 새 쑥쑥 커선 가버린다. 그냥 사랑만 줘.”
외상을 달아둔 호떡집에도 들렀다. 애들 호떡을 사 먹였다가 지갑을 두고 와 난감해할 때 나중에 들러서 주라던 호떡 장수 할머니. 죄송해서 곧장 드리러 온 길이었다. 호떡 2개에 외상값 3000원을 갚았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내가 가르쳐 준 대로 아이들이 돈을 건네고 꾸벅 인사했다. 근데 할머니가 돌아서는 아이들을 붙잡는다. “둘이 사이좋게 나눠 먹어라.” 막 구운 호떡 하나를 건네준다. 손사래를 치는 내게 “애기 엄마, 투 플러스 원이야!”라며 할머니가 자글자글 웃는다. 그러니까 늘 이런다. 시장에 가면, 살아야지. 감사히 살아야지. 뭉클해져 돌아온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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