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직전 이른바 ‘빅5’ 전공의 대표들이 전공의 약 1만 명의 집단 사직 교사 혐의로 차례대로 경찰에 출석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경찰 주장대로 집단행동이든, 전공의 주장대로 자발적인 선택이든 일제히 환자 곁을 떠난 건 직업 윤리상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취재진 앞에 선 그들의 항변을 듣자니 전공의 집단 사직을 개인주의적 MZ세대의 ‘탕핑(躺平·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만 치부하기엔 그 울분은 합당했고, 좌절은 깊었다.
“상급병원 VIP들이 의료 정책 결정”
11일 김유영 삼성서울병원 전공의 대표는 “언제, 어디가 아파도 상급병원에서 VIP 대접을 받는 권력자들이 의료 현안, 의료 정책을 결정한다는 게 화가 난다”고 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사이로 분기탱천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취과 전공의로 돈 벌기는 어려운 소아마취 전문의를 꿈꿨지만,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병원에서 밤낮으로 일하던 대한민국 청년이라는 한성존 서울아산병원 전공의 대표는 “미래 세대를 짓밟는 일방적인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김태근 가톨릭중앙의료원 전공의 대표는 “현 정부의 정책은 젊은 세대에게 많은 책임을 전가한다”고 했다. 이들은 의대 2000명 증원이 기성세대의 기득권을 지키면서 청년 세대를 착취하는 ‘가짜 개혁’ 아니냐고 묻고 있다.
1977년 처음 도입된 국민건강보험은 ‘저(低)부담, 저수가, 저보장’으로 설계됐다. 국가와 국민이 가난했던 시절이라 보험료와 수가를 낮게 책정하는 대신 보장 범위를 최소화했다. 그동안 왜곡된 수가의 풍선 효과로 필수의료 기피 현상이 심각해졌고, 역대 정권마다 보장성 강화를 외치면서 건강보험은 서서히 망가져 왔다. 전공의들은 이 낡은 시스템을 수술하지 않고 의사 수를 늘려 땜질하려는 데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의료 시스템을 지탱한 건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싼 임금을 감수했던 전공의였다는 사실이 이번 의정 갈등 속에 드러났다. 이들은 보험료 인상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지지 않을 정부도, “의대 교수들은 착취의 중간관리자”라고 했듯 제도에 순응해 과실을 독점한 선배 의사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의대 증원으로 진통제를 놓아 오늘을 넘기고 보는 게 의료 개혁의 본질이라고 판단했다.
다른 청년들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그래도 전공의들은 의사 면허를 가졌기에 7개월이 넘도록 탕핑도 하고, 재취업도 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저항할 권리를 누린다는 것도 특권일지 모르겠다. 기성세대가 만든 사회 제도 안에서 질식당한 채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청년이 훨씬 많다.
근로자의 10%인 정규직이 임금과 복지를 독차지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아래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려는 청년들의 취업 전쟁은 눈물겹다. 정부의 노동 개혁은 이런 핵심은 손도 못 대면서 주 52시간 개편 같은 지엽적인 과제조차 회피한다. 청년 세대에 빚만 물려주게 생긴 연금은 어떠한가. 5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인상하는 국회 모수개혁안을 걷어차고는 세금 먹는 하마인 기초연금 인상을 앞세운 정부 개혁안을 내놓았다.
한 해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줄었는데 여전히 ‘산업 전사’ 대량 생산에 맞춰진 교육은 가장 심각하다. 교수나 교사의 반발을 불러올 구조조정보다는 대입 제도처럼 줄 세우는 방법만 바꾸면서 학생들을 우롱한다. 그러면서 교육발전특구 도입 같은 개혁 시늉만 낸다.
박재일 서울대병원 전공의 대표는 이번 의료 개혁을 두고 “대한민국에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미래 세대에 숨통을 틔워 주기보다 공고히 쌓인 기득권을 우회하려는 4대 ‘대증요법’ 개혁 모두 그렇지 않나. 그마저도 멈춰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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