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을 건너 돌아오는 말[내가 만난 명문장/김세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29일 22시 54분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최은영의 ‘밝은 밤’ 중


김세실 동화 작가
김세실 동화 작가
멀게만 느껴지는,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시간으로부터 툭 날아온 편지처럼 ‘밝은 밤’은 우리에게 아득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서사는 지연이 ‘희령’이라는 도시에 터를 잡아 유년 이후로 왕래가 없던 할머니를 만나며 시작되는데 할머니 영옥이 손녀 지연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어두웠던 지연의 일상을 빛으로 이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마주친 상처와 모욕에도 불구하고 끝내 영옥을 살아가게 한 사랑의 서사는 손상된 지연의 내면을 한 겹씩 들춰내며 마음을 온전히 바라보게 한다.

홀로 남겨졌던 지연의 속처럼 마음이 진공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어떠한 힘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에 마음을 내려두면 어떻게 될까. 무거워서 가라앉을까, 가벼워서 붕 떠버릴까. 가라앉지도, 뜨지도 못한 채 심연을 일렁이는 지연을 감싸는 영옥의 말들에서 기억과 이야기의 힘이 확연해진다.

작품은 영옥의 기억을 지연의 삶에 풀어내며 하염없이 슬픈 이야기를 쌓아간다. 간절히 기억을 더듬는 영옥을 바라보며 지연은 앞서 살아간 사람들의 슬픔을 그려본다. 헤아림 속에서 영옥의 기억은 지연의 기억이 되고 슬픈 기억은 사랑의 이야기로 전유된다. 슬픔과 사랑은 다른 말이 아니라는 듯 슬픔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기억은 사람에게 다가간다.

1950년에 쓰인 새비의 편지가 반세기를 지나 지연에게서 발화될 때처럼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할 때 오래도록 온축된 사랑의 겹이 창졸간 벅차게 다가온다. 그렇게 긴 시간을 건너 돌아오는 말들이 있어 기억은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삶을 피워낸다.
#최은영#밝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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