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학도, 기업도 고성능 인공지능(AI) 칩이 없어 연구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국 과학계를 대표하는 KAIST가 보유한 엔비디아의 고성능 AI칩 ‘H100’은 0개. 기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국내 기업 1400여 곳이 가진 H100 개수를 모두 합쳐도 2000개뿐이었다. 최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와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한 내용이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나 메타가 15만 개씩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다. 미국에선 심지어 대학들도 한 개에 6000만 원씩이나 하는 H100 쇼핑을 경쟁적으로 하고 있다. 올해 하버드대가 400개, 프린스턴대가 300개를 구매한다고 발표했다.
왜 대학들도 나서서 AI칩 구매 계획을 발표할까. 인재 유치를 위해서다. 고성능 칩 보유량은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즉 컴퓨팅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AI 개발에 필수적인 컴퓨팅 자원이 있어야 인재가 모이고, 이들이 시너지를 내면 더욱더 많은 투자를 받아 혁신적 성과를 낼 수 있다.
유럽 AI의 자부심이자 오픈AI 대항마로 떠오른 스타트업 ‘미스트랄 AI’도 유럽의 공공 AI 인프라 덕을 본 사례다. 지난해 창업 이후 1년 만에 최근 기업가치가 58억 달러(약 7조8000억 원)까지 뛴 이 회사는 생성형AI 모델 개발에 유럽 각국이 투자해 만든 슈퍼컴퓨터 ‘레오나르도’를 이용했다.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활용할 수 없었다면 미국 빅테크의 대항마 스타트업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산업화 시대에 고속도로나 해운 같은 물류, 정유나 철강 같은 기간산업이 필수적이었다면 AI 시대에는 이처럼 새 인프라가 필요하다. AI 칩, 데이터, 전력, 인재 등이다. 문제는 AI 인프라 확충은 역대급 ‘쩐의 전쟁’이라는 점이다. 세계 AI 투자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인재를 싹쓸이한 미국과 중국이 AI 주요 2개국(G2)으로 떠오른 이유다. 오일머니를 앞세운 중동, 유럽 AI 맹주를 꿈꾸는 프랑스, AI 연구는 앞섰지만 상업화 동력이 떨어진 캐나다 등은 부족한 민간 여력을 국가가 채우며 G3라도 되겠다고 발벗고 나선 상태다.
우리 정부도 늦게나마 G3 도약을 선언하고 최근 국가인공지능위원회를 출범해 인프라 확대를 발표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H100 보유 수준을 15배까지 늘리고 4년 내 민간투자 65조 원을 독려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역대급 쩐의 전쟁에 필요한 총알, 즉 정부 예산이 보이지 않는다.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AI 칩 기반 데이터센터는 누가 어디에 어떻게 지을지 아직 모르겠다. 반면 4월에 캐나다, 5월에 프랑스는 구체적 지원안과 더불어 AI 강국 도약을 선언했다. 특히 캐나다는 올해 예산에 2조 원 이상 AI 인프라 투자를 편성한 뒤 이를 발표했다.
인프라 투자 전쟁의 판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다. 기업가치 200조 원이 넘는 오픈AI마저 최근 미국 정부에 AI 인프라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할 정도다. 우리 정부도 G3 선언을 받침할 구체적 후속 법안이나 예산 지원, 세액 지원 등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말뿐인 G3 도약은 아무런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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