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정보의 완전한 소통’으로 이뤄낸 것들[기고/김주원]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7일 2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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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세종 임금의 훈민정음 창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문학적 업적이다. 한글날은 한자를 몰라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배우고 쓰기 쉬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3년간의 실험 과정을 거친 후 반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는 반포 578돌이 되는 해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은 세계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지구상의 어떤 군주도 세종 임금처럼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문자를 만들어서 쓰게 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덕분에 백성들은 한글로 일상어를 전면적으로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편지나 문학 작품을 쓸 수 있었으며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한문 숭상 의식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한글은 거의 500년 동안 비주류 문자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우리에게는 한글날 외에도 제2의 한글날로 기념해야 할 날이 있다. 1894년 11월 21일에 고종의 칙령으로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을 혼용한다”라고 선포한 것인데, 이 칙령은 비록 실효성은 약했지만, 한글이 처음으로 ‘국문’의 지위를 갖게 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를 전후로 나온 호머 헐버트 선생의 ‘사민필지’(1891년)와 주시경 선생이 편집한 ‘독립신문’(1896년) 한글판은 한문이 지배하고 있던 사회에서 보란 듯이 한글만으로 쓴 교과서와 신문을 발행한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들의 생각은 100년을 앞서간 것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왜 한국어와 한글의 교육·연구에 온 힘을 기울였을까? 그 이유는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더라도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국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올곧은 신념 때문이었다.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1910년)라고 외쳤으며, 또한 “글은 말을 담는 그릇이니 이지러짐이 없고 자리를 반듯하게 잡아 굳게 선 뒤에야 그 말을 잘 지키나니라”(1910년)라고 하여 반듯한 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세운 조선어연구회(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이름 바꿈)에서는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여 1926년에 ‘가갸날’을 처음 제정하였고, 2년 후인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한글의 역사를 문자사적 측면에서만 이야기하였지만 한글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은 따로 있다. 1945년에 광복 후, 일본어 교육을 받은 세대들의 한글 이해력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조선어학회에서 마련한 한글맞춤법(1933년)을 바탕으로 하여 큰 혼란 없이 한글 교육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상적인 어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즉 한글을 통해서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일상적인 문자 정보를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 이러한 정보의 완전한 소통을 통해서 비약적인 경제 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과 나란히 설 수 있게 된 바탕에 한글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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