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같은 사람의 ‘바람’ 같은 존재감[서광원의 자연과 삶]〈95〉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8일 23시 00분


로마 교황청을 담당하는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가 큰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닌데도 바쁠 때가 있다. 연설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성베드로 광장으로 나온 교황의 모자(추케토)가 바람에 획 날아가거나 옷이 얼굴을 다 덮어버리는 ‘사고’가 생길 때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이 순간을 ‘호시탐탐’ 기다려온 카메라들이 놓칠 리 없다. 평소 볼 수 없는 교황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서다. 전 세계 미디어들 역시 교황이 당황해하는 사진을 즐겁게 게재한다. 중요한 연설 사진은 묻혀도 이런 사진이 묻히는 일은 별로 없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 존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바람이지만, 이 없는 것이 엄연하게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낸다. 얼마 전 끝난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 선수들의 심박수를 오르내리게 하며 메달 색깔을 좌지우지했던 것도 상당 부분 바람이었고, 여름 내내 고대하던 가을이 온다는 걸 알려주며 우리가 입는 옷을 싹 바꾼 것 역시 그렇다. 없다고 없는 게 아닌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게 또 있다. 지금 이 글에서 띄어쓰기가 없다면 어떨까? ‘대략 난감’을 넘어 읽는 걸 포기하는 일이 속출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빈칸이 있어 이 신문에 실린 수많은 정보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외려 없어서는 안 되는 역할을 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은 자신의 결혼기념일이나 자녀의 생일은 잊어도 우편번호는 기억한다. 혹시 이걸 잊으면 큰일 나는 걸까? 그게 아니라 인간을 잘 아는 심리학자들이 만든 덕분에 기억하기 쉬워서다. 영국의 우편번호는 ‘MW5 9EG’ 식으로 되어 있는데, 눈에 쉽게 들어오는 숫자를 가운데에 두고, 잘 들어오지 않는 자음을 양쪽 끝에 배치하면서, 중간에 빈칸을 두어 구별하기 쉽게 한다.

우리야 별로 쓰지 않아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영국인들은 아주 쉽게 기억한다. 아무런 값이 없는 숫자 영(0)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듯, 상품 판매대의 빈 공간이 그냥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인기를 말해 주듯 빈칸 역시 없음으로 있음을 만든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렸던 이나모리 가즈오 교세라 창업주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회사 초기, 술자리에서 내 옆에 와 ‘사장님을 존경합니다. 영원히 옆에서 도우며 충성하겠습니다’라고 외치던 간부 중 지금 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 도망갔다. 오히려 조용히 있던 평범한 직원들이 나와 끝까지 함께했다.” 빈칸 같은 사람이 진짜라는 얘기였다.

바닷가 나무들이 보이지 않는 바람의 영향을 받아 한쪽으로 쏠리는 모양을 하고 있듯 우리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영향을 받는다. 더러 교황까지 당황스럽게 하는 홱 몰아치는 바람 같은 사람도 있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빈칸 같은 사람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의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 역시 내가 모르는 빈칸 같은 누군가의 덕분일 수 있다.
#바람#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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