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계의 오래된 이슈인 ‘관치(官治)금융’ 논란은 현 정부 들어 ‘정치(政治)금융’으로 한 단계 진화하며 더욱 교묘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략) 대중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덜 미치는 자리들까지 정권에 줄을 댄 민간인이나 정치인 출신들의 ‘먹잇감’이 돼 가고 있다는 게 금융권의 불만이다.”(2014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노트북을 뒤지다 10년 전 작성했던 기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기사에 등장한 낙하산 인사의 이름만 달라졌을 뿐 10년의 간격이 무색하리만치 최근의 상황과 똑 닮아 있었다. 그만큼 ‘낙하산 인사’가 우리 금융시장의 고질적 병폐라는 얘기일 것이다.
정부 부처 출신의 ‘관(官)피아’냐, 정치권 출신의 ‘정(政)피아’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낙하산은 어김없이 금융권에 착륙했다. 4대 은행 직원 평균 연봉이 1억2000만 원에 육박하는 고임금 금융권에는 수억 원의 연봉에 업무도 과중하지 않은 ‘꽃보직’이 수두룩하니. 게다가 촘촘한 규제가 가득한 금융산업에서 낙하산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보상은 크되 눈에 안 띄는 틈새 노려
씁쓸한 것은 이 같은 행태가 근절되기는커녕 최근 들어 더 지능적인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갈수록 이목이 쏠리는 대표직보다는, 보상은 큰데 눈에는 덜 띄는 ‘감사’ ‘사외이사’ 등 알짜 보직을 영리하게 선별해내 채 간다. 은행보다는 보험, 자본시장 등의 틈새를 노린다. ‘연합자산관리(유암코)’, ‘SGI서울보증’같이 대중에게는 낯선 곳 말이다. 과거 관피아들은 적어도 경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라도 갖췄다면, 최근에는 금융 관련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도 뻔뻔하게 감사 등의 직책을 맡는다. 본보에 따르면 최근 2년여간 대통령실을 떠나며 취업 심사를 받은 44명 중 건설사 출신의 김대남 전 SGI서울보증 상근감사를 포함한 8명이 금융권에 착륙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낙하산이 금융산업에 가져오는 폐해는 한둘이 아니다. 낙하산들이 선호한다는 ‘감사’ 자리는 결코 김 전 감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만고땡’(편하다는 뜻의 비속어)의 자리가 아니다. 해당 기관의 사실상 2인자로서 내부통제를 총괄하고 회계 등을 관리해야 하는 엄중한 자리다. 사외이사도 경영진을 견제해야 하는 중요한 위치다. 이 같은 자리를 전문성이 일천한 사람들이 맡아 다음 보직을 위해 쉬어 가는 ‘정거장’ 정도로 여기며 임하니 금융사고가 빈발하고, 내부통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과거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해 낙하산의 단골 착륙지가 됐던 우리은행에서 700억 원대 횡령이 발생하는 등 유달리 금융사고가 빈번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낙하산 근절 없이는 금융 선진화 요원
조직의 열패감도 빼놓을 수 없다. 하도 낙하산이 내려오니 직원들은 물론이고 각 기업 노조에서조차 이제 낙하산에 아예 무력하고 무감각해진 모습이다. 어느 순간 노조의 출근 저지도 뜸해졌다.
금융 당국의 ‘영(令)’도 제대로 서지 않는다. 최근 횡령, 부당대출 등 민간 은행들의 사고가 잇따르자 김병환 금융위원장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금융 당국 수장들이 나서 내부통제 시스템 강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내부통제 최일선의 주요 직책에 계속 낙하산이 착륙하는 상황 속에서 아무리 당국이 내부통제 강화에 목소리를 높인다 한들 과연 힘이 실리겠는가.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융 선진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금융의 삼성전자’를 키워야 한다며 여러 가지 전략도 쏟아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적어도 낙하산 인사가 계속되는 한 금융선진화는 요원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이 지겨운 쳇바퀴를 끊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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