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보미]모든 걸 짜낸 나달… 땀 한 방울 안 남기고 떠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16일 23시 12분


임보미 스포츠부 기자
임보미 스포츠부 기자
‘여든 살이 되어 (고향인 스페인) 마요르카 집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라파엘에게는 그 어떤 후회도 없을 것이다.’

라파엘 나달이 프로 테니스 커리어를 마감한다고 발표한 뒤 그를 테니스의 길로 이끈 삼촌 토니 나달은 13일 스페인 일간 엘 파이스에 낸 ‘라파엘, 널 존경해’란 기고문에 이렇게 적었다. 삼촌 나달은 나달이 세 살 때부터 테니스를 가르쳐 2017년 2월까지 코치로 함께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조카와 했던 약속을 전했다. 꽤 유명했던 전직 테니스 선수가 그에게 “우승을 더 못해서가 아니라 내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 때문에 커리어에 만족하지 못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조카 나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며 “네가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러자 나달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걱정 마세요. 제가 떠날 때는 모든 걸 다 바쳐서 평안한 마음일 거예요.”

나달은 10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은퇴 발표를 하면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내면에 완벽한 평안을 가지고 떠난다”고.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20세기 첫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1919∼1972)은 ‘운동선수는 두 번 죽는다’고 말했다. 선수가 마지막으로 운동장을 떠나는 게 한생의 마감에 준한다는 비유다.

1986년생 나달은 열아홉 살 때(2005년) 뮐러 와이스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발에 있는 뼈 조직에 변형을 일으키는 이 희귀 질환으로 나달은 고질적 통증을 안고 살았다. 커리어 내내 열에 아홉 번은 발 통증 탓에 훈련을 중단하곤 했다. 일반 투어(3세트제)와 달리 5세트까지 치르는 메이저대회는 늘 진통제와 함께였다. 당시 역대 최다 기록이었던 개인 통산 22번째이자 마지막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한 2022년 프랑스오픈 때도 오른발 감각을 마비시키는 마취 주사를 맞고 뛰었다.

최근 2년은 복근, 둔근 부상도 이어져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었다. 지난해 프랑스오픈부터 4개 메이저대회에 연속해 나오지 못한 나달은 끊임없는 ‘은퇴설’에 시달렸다. 당시 공식 석상에 설 때마다 나달은 “마이크를 잡고 은퇴할 순 없다. 코트에서 한 경기라도 뛰고 은퇴할 것”이라고 했다. 나달이 마침내 올해 프랑스오픈에 복귀했을 때도 모두가 이번 대회를 나달의 ‘라스트 댄스’라 여겼다. 그러나 나달은 이번에도 “내년에 꼭 돌아올 것”이라며 주최 측이 마련한 은퇴 행사도 마다했다.

나달은 늘 포기를 몰랐다. 부상으로 상대 선수마저 걱정할 만큼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 역전승을 거두는 건 나달 경기의 오래된 레퍼토리였다. 은퇴도 그렇게 미루고 미뤘다. 그랬던 나달이 더는 안 된다고 한다. 이제 정말 더 짜낼 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20년 가까이 고통과 불확실성이 계속된 선수의 삶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쏟아냈기에 나달은 평안에 이른 채 자신의 ‘첫 번째 죽음’을 맞았다. 나달이 끝까지 짜냈던 땀방울은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그리워할 것이다.

#라파엘 나달#프로#테니스#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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