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증시 부양이 밸류업이라는 착각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16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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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장
유재동 경제부장
“밸류업한다고 증시 오르겠어요?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 뭐라도 되지.”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 금융당국 고위 관료가 털어놓은 얘기는 아무리 사석(私席)이었지만 너무 솔직했다.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같은 대책들은 곁가지일 뿐이고 결국엔 주가와 비례적 함수 관계에 있는 기업 실적이 받쳐주지 않으면 밸류업이고 뭐고 공염불이라는 그의 주장은 물론 일리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증시 밸류업의 주무부처 관료가 이렇게 대놓고 존재론적 ‘자기 부정’을 하다니…. 증시 문제를 바라보는 대통령, 넓게 말해 여야 정치권과 관료·전문가 그룹 간 인식차가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세금 깎아주는 등 단기 성과에만 집착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한다며 정부가 증시 밸류업 정책을 추진한 지도 1년이 다 돼 간다. 올해 초 일본을 벤치마킹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야심 차게 ‘코리아 밸류업 지수’까지 내놨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한국거래소를 두 번이나 찾으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고 대주주 주식양도세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같은 세제 지원책도 줄줄이 나왔다. 하지만 성적표는 아직 초라하다. 올 들어 미국 일본 등 주요국 지수가 20% 안팎 고공행진을 하는 동안 코스피는 상승은커녕 되레 뒷걸음질 쳤다. 자사 주가의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기업도 상장사 중 1%가 채 안 된다.

기업의 주주 친화적 경영을 유도해 시장 평가를 높이겠다는 밸류업의 큰 방향은 옳다. 기업들이 지금보다는 배당을 늘리고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한편 오너 일가의 이익만 챙기는 일부 기업들의 행태에 변화를 주는 것도 필요하다. 문제는 밸류업의 본질인 ‘기업가치 제고’보다 ‘증시 부양’이라는 단기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앞뒤를 가리지 않은 대책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금융투자소득세다. 금융상품 투자수익에 일정 비율로 과세한다는 이 제도는 여야 합의로 마련돼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지만 정부여당이 개인투자자 표심을 우려해 느닷없이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금투세를 굳이 없앤다면 적어도 ‘패키지 딜’로 추진돼 왔던 거래세 인하라도 되돌려 재정 누수를 막아야 하는데 거래세는 또 원래대로 낮추겠다고 한다. 평소 건전재정을 중시한다던 정권이 맞나 싶다.

기업 환경과 경제 활력 개선이 핵심

정부가 아예 ‘공포 마케팅’을 조장하기도 한다. 주가 하락이 예상되는 주식을 빌려 팔아 수익을 내는 공매도는 모든 선진국에 보편화된 투자 기법이고 시장의 과도한 거품을 빼는 순기능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공매도는 주가 폭락의 주범→공매도 금지는 밸류업’이라는 일부 투자자 단체의 단선적 주장에 확성기를 대주기 바쁘다. 국제 표준을 한참 벗어난 규제의 결과는 해외 투자자들이 이탈하고 증시의 선진지수 편입이 번번이 좌절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밸류업의 사다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다.

대통령과 여권은 어떻게든 시장에 거품을 주입해 지수를 끌어올리는 게 밸류업의 본질이라고 믿는 듯하다. 마치 우리 증시의 실패가 공매도와 금투세 때문이고 이를 없애지 않으면 주가가 당장이라도 폭망할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러나 진정한 밸류업은 주주 환원 확대,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함께 경제 활력을 높이고 혁신기업이 양산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그 뻔한 진리를 굳이 또 강조해야 하나 싶다. 최근 어느 해외 연기금 관계자가 우리 증시를 놓고 “저평가라는 말도 부끄럽다”고 혹평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저평가’라는 말이 너무 후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증시는 저평가된 게 아니라 딱 수준에 맞는 적당한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밸류업#코리아 디스카운트#단기 성과#금융투자소득세#공포 마케팅#공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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