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의 ‘자유와 인권 광장’에 극빈과 폭력, 배고픔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고자 약 10만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날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온 이들은 빈곤이 인권 침해임을 천명하고 기본권을 지키기 위한 집단행동을 강조했다. 이후 매년 10월 17일 지구촌 각지에서 빈곤에 처한 이들과 연대를 보여주기 위한 집회가 이어졌다. 유엔 총회는 1992년 12월 22일 결의안을 채택해 10월 17일을 ‘세계 빈곤퇴치의 날’로 정했다.
유엔이 그동안 제시해 온 빈곤퇴치의 날 세부 주제에서 빈곤에 대한 유엔의 접근이 일관되게 드러난다. 빈곤은 인권 침해이며, 그 해결은 인권 문제로 접근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제도적 냉대 종료와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포용적인 사회를 위한 실천’을 천명한 올해 역시 마찬가지다.
80억 지구촌 인구의 약 9%가 지금도 절대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해 인간적 존엄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약 7억 명이라는 말이다. 빈곤은 개인이나 일개 국가가 스스로 탈출하기 어렵다. 빈곤은 신용 자본 접근성 제한, 심각한 수준의 환경오염, 부정부패, 자본잠식, 열악한 교육제도, 전염병의 창궐, 공중보건 기반 약화, 부족한 인프라 같은 복합적이고 제도적인 요인으로 악순환을 거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빈곤의 덫’이다. 우리가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전 세계 빈곤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원조가 무조건 빈곤 퇴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에 기반해 개인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빈곤 퇴치는 인권을 증진하는 길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권이 보호되고 보장돼야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고 빈곤이 퇴치될 수 있는 것이다.
6·25전쟁 직후 한국의 절대 빈곤율은 50% 이상이었다. 하지만 1인당 국민총소득 67달러의 원조 수혜국 한국은 2010년 공여국으로 공식 탈바꿈한 첫 번째 나라가 됐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우리의 경제성장은 앞선 세대의 희생과 정치적 리더십, 선진국의 경제원조가 삼박자를 이룬 결과일 것이다. 그 기저에 교육권과 건강권, 참정권 등 인권을 위한 초석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장이었다. 반면 대부분 개발도상국은 엄청난 원조에도 불구하고 인권 보호에 실패해 빈곤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지구촌의 모범국가로서 이 구조적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하는 위치에 섰다. 12월 서울에서 국제개발협회(IDA) 재원보충회의가 열린다. IDA는 1960년에 설립된 세계은행 그룹 소속 기관으로 저개발 국가의 경제 발전과 빈곤 퇴치에 주력하고 있다. IDA가 3년마다 여는 재원보충회의에는 공여국과 수원국 대표가 참여해 지난 성과를 검토하고 향후 재정 지원 순위를 논한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 요청이 커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번 회의에서 개최국이자 모범적 발전 과정을 걸어 온 한국 정부가 어떠한 기여를 할지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지구촌 모든 가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선진국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K-ODA의 힘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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