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주점[이준식의 한시 한 수]〈287〉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4일 2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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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 아가씨가 연 주점, 밤이면 시끌벅적 악기 연주 요란하다.
붉은 양탄자엔 초승달 달빛이 깔리고, 담비 털옷 손님들은 무서리 내린 정원에 앉았다.
옥쟁반에는 갓 썰어 온 잉어회, 금빛 솥 안에는 막 끓어오르는 양고기.
귀빈들은 자리 뜰 줄 모른 채, ‘낙세낭’ 노랫가락을 듣고 있다.
(胡姬春酒店, 弦管夜鏘鏘. 紅毾鋪新月, 貂裘坐薄霜. 玉盤初鱠鯉, 金鼎正烹羊. 上客無勞散, 聽歌樂世娘.)

―‘주점의 서역 아가씨에게 보내다(증주점호희·贈酒店胡姬)’ 하조(賀朝·당대 초중엽)


실크로드를 타고 중원에 밀려든 서역 문화.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서아시아 지역까지 아우른다. 호희(胡姬)는 바로 그 서역이나 북방 출신의 여인. ‘오랑캐 지역 여자’라는 뜻이다. 한족이 아닌 이민족을 얕잡아 부른 명칭이지만 이방인을 통칭한다. 이방인이 연 주점이니 음주가무를 도락으로 여겨온 선비들이 제법 호기심을 품었음 직하다. 이백의 시에도 ‘(부잣집 자제들) 낙화 밟기가 끝나면 어디로 갈까. 시시덕대며 호희의 주점으로 들어가지’(‘소년의 노래’)라 했고, ‘꽃처럼 어여쁜 호희, 봄바람 속에 술청을 지키고 있으니, … 그대 오늘 어찌 취하지 않고 돌아가겠소’(‘술통을 앞에 놓고’)라 했다.

이 주점의 분위기도 여간 별스럽지 않다. 요란한 음악, 붉은 양탄자, 번쩍이는 기물에 고급 음식까지 곁들였으니 꽤 호화롭고 거한 자리다. 손님을 붙잡아두려는 듯 호희의 노랫가락이 한껏 주흥을 돋우고 있다. 남 얘기하듯 묘사한 것으로 보아 주점 풍경은 시인의 상상 아니면 귀동냥에서 나왔을 성싶다.

#이방인#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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