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컴퓨터비전 석학 권인소 KAIST 교수
인간 눈 뛰어넘는 인공 시각 연구 중… 물체 사이 상관관계 이해 로봇 개발
32년간 교수, 도전 두려워 말라 강조… 스스로 포기하기 전에 실패란 없어
넓고 크고 멀리 보는 시야도 중요… 인촌상 상금은 AI 인력 양성 기부
《국내 대표 인공지능(AI) 컴퓨터비전 석학으로 꼽히는 권인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KAIST 교수(66)의 연구실은 의외로 소박했다. 24일 대전 유성구에 있는 KAIST 연구실을 찾았을 때 온갖 AI 서적으로 뒤덮여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책꽂이에는 ‘국화와 칼’, ‘생각의 탄생’ 등 인문학 서적 수십 권만 꽂혀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인공지능 분야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옛 서적은 별 도움이 안 돼 작년에 은퇴하면서 전공 서적은 모두 처분했다”며 “하지만 우리 삶과 관련된 인문학 책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책을 둘러보는 기자를 소파로 이끌더니 보이차를 끓여 줬다. “우울증을 앓는 제자들이 간혹 있다. 항상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더 똑똑한 애들을 보면 우울증을 앓는다. 그럼 내 사무실로 불러 이 보이차를 꾸준히 대접했다. 열이면 열 모두 다시 건강해진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1980년대 국내 불모지였던 로봇공학·컴퓨터비전 분야에 도전해 세계적 연구 성과를 낸 석학이다. 1세대 컴퓨터비전 연구자로 200여 명의 제자도 길러냈다. 현재 국내 대학 AI 분야 교수 상당수가 권 교수의 제자다. 이 같은 연구 업적과 공로를 인정받아 올해 인촌상(과학·기술 부문)을 수상했다.》
―요즘 하고 있는 연구는….
“인공지능 연구를 시작하면서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는 인간 시각 시스템을 넘어선 인공 시각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하고 있던 연구를 더 개선시키는 연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목표를 인간 시각 시스템을 능가하는 인공 시각 시스템을 만드는 것으로 세웠다.”
권 교수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노트북과 대형 모니터를 켰다. 기자가 보낸 사전 질문지에 대한 답을 미리 정리해 각종 시각 및 동영상 자료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래서 인간 시각보다 더 나은 인공 시각을 만들어냈나.
“인간 시각 시스템에선 중요한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와인잔 일부분만을 묘사한 두 개의 스케치 그림을 보여주며) 왼쪽 그림을 보고 와인잔을 생각해 내긴 힘들지만 오른쪽을 보면 생각해 낼 수 있다. 즉, 인간 시각은 의미 없는 선보다 물체 인식과 관련된 중요한 선에 주의를 집중한다. 또 하나. 인간 시각 시스템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적으로 보고 물체를 인식한다. 이게 오늘날의 생성형 AI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 시각 시스템의 특징을 어떻게 (인공적인) 신경망으로 만들어 낼지 연구하고 있다.”
권 교수는 최근 인간이 주의력을 집중시키는 현상인 ‘어텐션’ 모델을 컴퓨터비전으로 확장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영상 인식 성능을 획기적으로 높인 ‘CBAM’ 알고리즘도 개발했다.
―로봇 연구 성과는 어떠한가.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지능형 로봇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로봇이 물체 사이의 상관관계와 물리 관계를 이해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다. 인공신경망을 만들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고, 최근 일정 성과도 얻었다. 로봇에게 사과가 든 쟁반을 치우게 했을 때 먼저 사과부터 다른 곳에 옮긴 뒤 쟁반을 가지런히 치운 것이다. 물체들 사이에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로봇이 이해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인간 수준의 이해를 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연구팀과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자동차 관련 연구에도 관심이 많은 걸로 안다.
“2008년부터 골프 카트를 개조해 캠퍼스 내에서 자율주행 연구를 했다. 2016∼2021년 기간엔 ‘시스루카(See through car)’ 시스템을 만들었다. 앞차를 투명하게 만들어 앞차 전방의 교통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제자 중 한 명은 자율주행 기술을 가지고 창업까지 했다. 강원 태백에서 제자의 자율주행 시스템으로 달리는 차와 인간 레이서가 운전하는 차가 트랙을 도는 대결을 펼쳤다. 자율주행차는 1분 32초 만에 트랙을 돌아 인간 레이서의 차(1분 19초)보다 늦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인간 레이서의 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나는 제자들에게 ‘집에서 학교까지 자신이 만든 자율주행 시스템을 장착한 차로 출퇴근하면 논문 안 써도 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동기 부여를 한다.”
―학사와 석사는 기계설계를 전공했지만 박사는 로봇공학을 선택했다.
“기계설계를 선택한 것은 자동차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 자동차 엔진은 말할 것 없고, 외관도 한국이 스스로의 기술로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1983년 국비유학생 시험 합격 후 한국기계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1년간 일했는데, 그때 운명이 바뀌었다. 로봇 설계팀에 배속됐는데, 너무나 재미있었다. 소프트웨어로 로봇의 팔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유학은 로봇 제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 세계에서 로봇 연구를 가장 잘하는 곳을 알아봤더니 미국 카네기멜런대였다.”
―컴퓨터비전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1984년 유학을 떠나 카네기멜런대 가나데 다케오(金出武雄) 교수를 만났다. 가나데 교수는 로봇 지식이 없는 나에게 ‘3개월 시간 줄 테니 로봇제어 알고리즘을 만들어 보라. 성공하면 제자로 받아주겠다’고 했다. 밤새워 만들었고,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눈이 펑펑 내리던 그해 12월 31일 가나데 교수로부터 OK를 받았다. 그런데 1985년 봄 내가 만든 알고리즘에 에러가 나 고가의 칩셋 보드에 불이 났다. 나는 연구실에서 쫓겨났다. 그때 가나데 교수가 ‘AI 컴퓨터비전팀이 있는데, 네가 이쪽에 도전하겠다고 하면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사실 컴퓨터비전팀 학생들이 훨씬 뛰어났고 입학하기도 더 어려웠다. ‘하늘이 어려움도 주지만 피할 길도 이렇게 만들어 주는구나’ 생각했다.”
―그때 경험을 지금의 제자들에게도 들려주나.
“당연하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을 수 있다. 그 고난을 피하다 보면 영원히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을 믿고 도전하면, 또 절실하면 하늘은 항상 길을 열어준다. 소프트웨어를 전혀 모르던 내가 지금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한다.”
―32년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교육 철학을 말해 달라.
“인공지능 분야는 논문 채택 비율이 매우 낮다. 10편 중 8편이 실패한다. 나는 제자들을 믿고 기다려준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이봐 해봤어’라고 말했다. 그 문구엔 비난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나는 ‘우리 해보자’라고 한다. 이번에 실패했지만 나는 너를 믿고 너는 나를 믿고, 그렇게 우리 다시 해보자는 것이다. 박사 논문 통과에 10년을 끈 학생도 있었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지만 10년 만에 디펜스에 성공했다. 지금은 모 대학 교수로 지낸다. 우리 실험실에선 본인 스스로 포기하기 전에는 실패란 없다.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다시 도전’과 같은 말이다.”
권 교수는 1992년 KAIST 교수가 된 이후 지금까지 박사 69명을 포함해 석박사 197명을 배출했다. 박사 수료자까지 포함하면 202명이다. 그중 현직 교수가 30명이다.
―넓은 시야의 중요성도 강조한다고 들었다.
“현대 심리학에서 시야가 좁은 사람과 넓은 사람을 비교 분석했다. 같은 병에 걸려도 시야가 넓은 사람의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사물을 아주 미세하게 보는 팀과 넓게 보는 팀에 동일한 수학 문제를 풀게 했더니, 넓게 보는 팀의 수학 성적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제자들에게 무조건 시야는 넓고 크고 멀리 가지라고 조언한다.”
―AI 시대, 자녀 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나.
“먼저, 고생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들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자녀가 눈치 못 채게 도와줘 스스로 극복하게 하라. 고난 극복의 경험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AI 시대에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재가 될 것이다. 두 번째는 가능한 한 책을 많이 읽고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하라는 것이다. 아주 좋아하는 책 중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이라는 게 있다. 그 책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두 가지에서 영향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매우 공감한다.”
―인촌상 수상을 다시 한번 축하드린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을 처음 읽은 후, 주인공 어니스트와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다. 내향적인 성격의 나는 언론에 노출된 적이 별로 없다. 소박한 연구 성과를 냈고, 열심히 제자를 키워내려 노력했다. 거기에 인촌기념회가 의미를 부여해 나에게 인촌상을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을 받으며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졌던 꿈이 현실화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1억 원의 상금은 AI 분야 발전을 위한 인력 양성과 기술 지원을 위해 기부하기로 제자들과 결정하고, 준비 중이다.”
권인소 교수(66)
△1958년 경북 안동 출생 △1981년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졸업 △1983년 한국기계연구원 연구원 △1990년 미국 카네기멜런대 로보틱스 박사 △1991년 도시바 연구개발센터 연구원 △1992년 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 교수 △2018년 KAIST 석좌교수 △2023년 KAIST 초세대협업연구실 책임교수 △2024년 인촌상(과학·기술 부문) 수상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