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이 27일 치러진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2012년 이후 4차례 선거에서 모두 단독 과반 의석을 차지했지만, 이번엔 연립정권의 다른 축인 공명당 의석을 합쳐도 215석에 그쳐 과반(233석)에 못 미쳤다. 이달 1일 취임한 이시바 총리는 취임 8일 만에 의회를 해산하는 승부수를 뒀지만 여소야대를 자초한 셈이 됐다. 내년 7월 참의원(상원) 선거 때까지 국정 성과를 못 낸다면 단명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자민당 참패의 최대 이유는 파벌 비자금 스캔들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언론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아베파를 중심으로 후원금 일부를 장부에 기록하지 않고 빼돌린 혐의가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총리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지자 의원 39명에게 ‘탈당 권고’ 등 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부패의 고리’는 끊어내지 못했다. 징계받은 의원들은 줄줄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자민당은 공천 배제 의원의 지역구에 국민 세금인 교부금을 1억8000만 원씩 나눠주기도 했다. 그 결과 비자금 연루 의원 46명 중 60% 이상이 심판받은 것은 물론 연립 여당인 공명당 대표와 자민당 소속 현직 장관 2명도 낙선했다.
NHK 출구조사에 응한 유권자들은 나빠진 민생도 여당 심판의 이유라고 답했다. 자민당은 아베 신조 총리 집권기에 돈 풀기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을 꾀했지만 빈부 격차만 벌려놓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만성적 엔화 약세로 수입품 가격이 오르면서 물가가 뛰었고, 실질 임금이 2년 넘게 하락했다.
취임 한 달도 안 된 새 총리를 흔들 정도로 일본 유권자들은 매서웠다. 이시바 총리는 우경화한 자민당 내에서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비교적 개혁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그조차 취임 직후 개혁에 머뭇거렸고, 야당과 대화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채 의회를 서둘러 해산했다. 결국 이시바 총리는 국민이 원하는 민생 회복 방안과 정치 개혁, 국민이 듣고 싶은 메시지를 내놓지 못했고, 민심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이시바 총리는 “일본이 전쟁 책임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며 비교적 전향적인 역사관을 밝혀 왔다. 하지만 이번 선거 패배로 한일관계는 기대만큼 빨리 개선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입지가 흔들리는 그가 당내 보수파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이 요구해 온 “물컵의 나머지 절반을 채우는 결단”에 나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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