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특파원 때 경험한 일본 경제는 육중한 코끼리 같았다. 글로벌 유가가 오르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도 일본 물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100년 이상 된 노포(老鋪)들이 즐비하고, 60, 70대 근로자를 쉽게 볼 수 있다. 혁신 기업이라 부를 만한 곳은 잘 없다. 기업들은 비용을 아끼고 조금씩 완성도를 높이는 ‘가이젠(改善)’에 주력했다.
일본에 비하면 한국 경제는 치타를 닮았다. 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일본의 절반에 못 미친다. 몸집이 작고 가볍기에 뭐든 빠르다. 어느 한 산업이 성장하면 전체 경제도 빠르게 커진다. 반도체, 정보기술(IT), 전자 등 분야에선 수시로 혁신 성장도 일어났다.
한 나라의 노동, 자본, 자원 등 모든 생산요소를 동원해 물가 상승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생산 수준이 잠재성장률이다.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잠재성장률은 낮아지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지난해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0.4%, 한국은 2.0%였다.
韓 잠재성장률이 美보다 낮은 이변
지난해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놀랍게도 2.1%였다. 경제 규모가 한국의 10배 이상인데 한국 잠재성장률보다 더 높았다. 학계 정설이 보기 좋게 깨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도 미국의 잠재성장률이 한국보다 높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은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다. 거대한 사자와 같다. 그런데 그 사자가 날렵한 치타보다 더 빨리 달리는 셈이다.
잠재성장률은 노동력과 자본, 생산성에 크게 좌우된다. 전 세계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고, 구글 등 혁신 기업들이 생산성을 끌어올리면서 미국의 잠재성장률도 함께 올랐다. 반면 저출산을 겪고 있는 한국은 노동력 투입을 늘리기 쉽지 않다. 생산성도 하루아침에 끌어올리기 힘들다. 반면 자본 투입은 상대적으로 늘리기 수월하다. 기업이 기계, 설비, 인프라 등에 투자하면 된다. 즉, 기업이 활발하게 공장을 돌리고 성장하면 잠재성장률도 높아진다.
하지만 최근 기업인들을 만나면 ‘투자’에 대해 고개를 흔든다. 쇼크 수준의 경제성장률 1.4%를 기록한 작년과 비교해 체감 경기가 나아진 게 없다고 했다. 특히 중국의 파괴력을 두려워했다. 과거 싼 가격 하나만 갖춘 중국이 이제는 기술력까지 겸비했다. 전자업계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중국과 사업 영역이 겹치면 망한다고 봐야 한다. 중국이 못 따라오거나, 아니면 중국이 손대지 않는 분야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분야가 잘 없다.
중동발 정세 불안으로 높아진 물류비가 아직도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미국 대선도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기업들은 몸을 낮춘다. 짓고 있던 공장도 속도를 늦출 판이다.
상법 개정안에 떨고 있는 기업들
다만 이런 것들은 모두 외부 요인이다. 국내 투자 환경이 외부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면 기업은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인들은 국내 투자 환경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다.
최근 한국전력은 일반용 전기요금을 동결하면서 산업용 전기요금만 사상 최대 폭으로 인상했다. 은행이나 정유사 등에 횡재세를 부과하자는 주장도 잊을 만하면 다시 나온다. 그 무엇보다 기업을 떨게 만드는 것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이다. 법이 통과되면 A기업 이사회가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는데 그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개별 주주들이 수시로 소송을 걸 수 있게 된다. 이런 국내외 환경 속에 기업이 과감한 투자에 나설 수 있을까. 사자가 치타보다 더 빨리 달리는 이례적 현상이 아예 고착화될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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