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있고 사이-존재이고 간주곡이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중
‘리좀(rhizome)’은 식물이 땅속에서 만든 줄기를 말한다. 우리말로 땅속줄기 또는 지하경(地下莖)이라고 한다. 리좀은 땅 위로 나오지 않는다. 지하에서 대지의 편평한 면을 따라 뻗어 나간다. 그러면서 리좀은 잎을 틔울 진짜 줄기를 땅 위로 밀어 올린다. 그러니까 리좀은 뿌리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다. 그냥 리좀이다.
대나무의 리좀에서 발아하여 땅 위로 올라온 것이 그 순하고 여린 죽순이다. 리좀은 전분과 단백질을 저장해 생강이나 강황처럼 비대해지기도 한다. 리좀은 땅굴을 파며 수평으로 줄기를 뻗는 능력이 대단한데, 그와 동시에 가지를 치고 또 쳐서 사방팔방 줄기차게 자란다. 자신의 복제품을 시작도 끝도 없이 줄줄 만든다. 리좀은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고 식물체와 식물체를 연결하고 식물과 무수한 미생물을 연결한다.
억새가 제철이다. 지금 핀 저 아름다운 억새들 무리에서 나는 억새와 물억새를 구분한다. 그 둘은 리좀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뻗는, 서로 다른 종이다. 땅을 파서 보지 않아도 안다. 억새는 리좀이 똬리를 틀 듯이 안으로 동그랗게 말리기 때문에 땅 위에서 한 아름 모여난다. 물억새는 리좀이 횡대로 뻗기 때문에 가로로 줄을 지어 늘어선 모양이다. 다시 말해 강강술래 하듯이 빙빙 뭉쳐나면 억새, 어깨동무하고 횡대로 서 있으면 물억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불리한 여건에서 리좀은 식물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리좀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타자를 지배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를 꿈꾸지 마라. 타자와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변화를 꿈꾸는 존재가 되라. 두 철학자가 말하는 것도 그 비슷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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