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민우]이름만 남은 존재감… 족보 없는 지역축제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3일 23시 09분


박민우 사회부 차장
박민우 사회부 차장
최근 일본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현을 찾는 한국인 여행객이 많다고 한다. 지인도 이곳에 다녀왔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일대)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가 주요 여행 테마다. 하급무사 출신으로 개혁가이자 사상가, 또 사업가였던 사카모토는 일본의 막부 체제를 끝내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카모토는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도쿄 미나토구 소프트뱅크그룹 본사에는 사카모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풍운아 사카모토의 삶에 푹 빠진 지인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 기리시마(霧島)에서 온천욕도 즐겼다고 했다. 에도 막부 말기인 1866년 사카모토가 부인 나가사키 료(楢崎龍)와 함께 허니문으로 다녀간 기리시마 온천은 일본 최초의 신혼여행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담과 함께 가고시마에서 유명하다는 ‘이모조추’(고구마 소주)에 대해서도 듣다 보니 언젠가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에 이끌려 외국인도 찾는 기리시마 온천과 달리 대전 유성온천은 내국인들에게도 외면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처음 개발해 1913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유성온천은 1970년대 국내 신혼여행지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각종 유흥시설이 난립하면서 휴양의 이미지는 퇴색됐고, 발길을 이끌 만한 스토리텔링도 부족했다. 결국 손님이 점점 줄면서 대표적인 숙박시설인 유성호텔마저 올해 3월 109년 만에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지역 경제를 살리고 주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지역축제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지역으로 갈수록 더 심각한 저출생, 고령화 때문이다. 1997년부터 열린 부산 ‘기장멸치축제’와 2009년부터 이어온 강원 속초시 ‘상도문마을 벚꽃 축제’는 올해 열리지 않았다. 관람객을 맞이할 마을 주민들이 고령화되면서 명맥이 끊긴 것이다. 나라살림연구소가 올해 8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지역주민의 지역축제 참가율은 2019년 대비 9.6% 줄었다. 같은 기간 외부 관광객의 1인당 소비액도 12.7% 감소했다.

지역의 고유한 특색을 지키고 알리던 주민들이 사라지고 있다. 지방 소멸은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단절시키고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과 애향심도 퇴색시킨다. 지역적 특색이 사라지고 이름만 남은 지자체가 과연 지속 가능할지 의문이다. 지역 소멸에 대응해 행정 통합이 이뤄지고 초광역권이 형성되면 지방 소도시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을까.

최근 경북 김천시는 설문조사 결과 김천이라는 지명이 ‘김밥천국’의 줄임말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시가 주도해 ‘김천김밥축제’를 기획했다. MZ세대들이 호응하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한편으론 서글프다. 지역의 존재감을 특산물도 명소도 아닌 이름(지명)으로 규정해야 하는 현실 때문이다. 일부 시민들의 제안처럼 경남 진주시에서는 주얼리(보석), 충북 청주시에서는 청주(술) 축제를 여는 날이 올까 봐 두렵다. 김 한 장 나오지 않는 내륙도시 김천에서 족보 없는 김밥을 먹는 것보다 더 값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지역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찾기 어려운 것도 문제다. 요즘 국내 지방에선 찾기 힘든 관광객들이 왜 이름도 생소한 일본 소도시를 찾아다니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존재감#족보#지역축제#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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