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는 작은 제주도라 불린다. 이 섬에는 봉래산(395m)이 우뚝 솟아 있다. 봉래산 자락에 마을이 형성돼 있는데 봉래동, 신선동, 청학동, 영선동 등 마을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도교적인 색채를 띤 지명이다. 섬 노인들은 봉래산 정상에 할매신이 있어 섬 주민의 안위를 관장한다고 믿는다. 이 할매신이 불로초를 길렀다고도 한다. 영도할매는 섬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떠나는 주민에게는 해코지한다. 섬을 나간 사람이 봉래산 정상에서 보이는 곳에 정착하면 3년 안에 망하게 한단다. 이 속설을 믿는 사람은 할매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밤에 몰래 빠져나가는 일도 있다고 노인들은 말했다. 봉래산이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서일까. 영광사, 극락암 등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 14개가 자리 잡고 있으며, 민간신앙과 연결된 기도처가 곳곳에 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노인들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봉래산 정상을 향해 걸었다. 꼭대기에 올라서 할매신이 깃들어 있다는 바위를 찾았다. 섬 주민들이 신성시하여 치성을 드리는 바위이지만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등산객은 할매바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봉래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남포동, 중앙동, 송도, 자갈치시장, 용두산공원, 초량동 등 부산의 많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도할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산하다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산제당과 아씨당이라는 기도처에 들렀더니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영도는 목마장이었다. 육지로 말을 보내는 통로인 서문으로 말을 끌고 나가면 멀쩡하던 말이 병들어 죽었다. 골머리를 앓던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최영 장군이 탐라국을 정벌했는데 탐라국 여왕이 장군을 흠모했다. 탐라를 떠난 최영 장군이 신돈의 모함으로 영도에 유배됐다는 소식을 여왕이 접한다. 장군을 만나기 위해 영도에 도착했으나, 헛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여왕은 장군을 그리워하다가 고독하게 죽는다. 원혼이 된 여왕은 정발 장군 꿈에 나타나 사당을 지어 위로해 달라고 한다. 정발 장군은 꿈 이야기를 조정에 전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명을 받아 산제당과 아씨당을 건립했다. 이후로 군마가 죽는 일이 없었다.” 여느 전설이 그렇듯 역사적인 인물에 설화적 상상력을 빚어 만든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제주도민의 영도 이주사에 관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어 흥미롭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영도에만 제주도민회관 건물과 제주은행이 있다. 영도에서 제주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녀문화전시관이 영도에 건립됐는데 제주 이외 지역에 해녀 관련 전시관이 만들어진 첫 사례다. 현재 육지 해안에는 제주도보다 많은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는데 그 시발점이 영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주도와 영도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 1934년 영도대교 개통식에서 부산 학생을 대표하는 기수가 제주 출신이었다. 영도에 거주하는 제주 출신 노인들의 자랑거리로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한때 섬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제주인일 정도로 영도는 작은 제주도였다.
아씨당 전설이 흥미로운 건 제주도민의 이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이 건립될 때부터 만들어진 이야기인지, 제주민이 많이 찾는 곳이기에 후대에 각색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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