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침범의 위험, 거리 조절의 균형[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5일 23시 03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신분석가와 피분석자의 관계는 매우 긴밀(緊密)합니다.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하기 힘든 내밀(內密)한 이야기를 하고 듣는 사이입니다. 세상 어떤 사이보다도 마음과 마음의 거리가 가깝습니다. 분석의 힘은 거기에서 나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모든 관계에서 그러하니 관계는 ‘양날의 검’처럼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거나 두 사람 모두 다칩니다. 마음과 마음이 긴밀하게 소통하는 사이여도 각자의 독자성(獨自性)을 존중하지 않고, 경계를 넘으면 소소한 문제부터 돌이킬 수 없는 문제까지 이어집니다. 한 번 경계가 허물어지고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미끄럼틀을 내려가듯이 바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석가는 늘 자신을 살펴보고 자신의 힘으로 어렵다고 느끼는 순간 즉시 경험이 많은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해결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피분석자를 위해서도.

경계 침범(侵犯)의 가능성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모든 상황에 내재(內在)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생존을 위해서도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관계는 나와 남, 남과 내가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관계는 맺기도 어렵지만 잘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연결된 모든 것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사이’라는 말 자체가 ‘거리, 틈, 공간’을 내포(內包)하고 있습니다. 틈이 아예 없으면 밀착(密着), 거리가 짧으면 긴밀, 멀면 서먹서먹한 관계입니다. 유지에 드는 비용은 밀착 관계에서 제일 큽니다. 밀착 관계를 고집하다가 버려서는 절대 안 될 것을 내던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태어나 살다가 죽는 한평생, ‘거리 조절’은 기본입니다.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옳게 설정하고 바르게 유지하고 시시때때로 조절해야 잘 삽니다. 갓난아기는 엄마와 밀착되어야 살아남습니다. 청소년은 부모에게 의존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개체(個體)로 자랍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청소년을 부모는 힘들어합니다.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하면서 부모와의 거리를 나름대로 확정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직장에서는 거리 조절 방법을 체험으로 배웁니다. 거리 조절에 실패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거리 유지와 조절’은 매일, 평생 풀어야 하는 숙제입니다. 어려움을 자주 겪습니다. 가족이든 남이든 내가 정한 거리를 흔들어서 간섭(干涉)하거나 침범하려 합니다. 어른이 된 자식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는 부모, 직원과의 거리를 지키지 않는 직장 상사의 행위는 모두 간섭이나 침범입니다. 경계를 넘으면 간섭, 경계를 넘어 상대가 위협을 느끼면 침범입니다.

‘담장’은 나와 남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구분합니다. 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출입문’은 내가 허락한 관계만 들이겠다는 메시지입니다. ‘창(窓)’을 가린다면 들여다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담장을 넘어서 들어오면 ‘침범’이고, 오라고 하지 않았는데 출입문을 두드리면 ‘간섭’입니다. ‘창’으로 몰래 들여다보면 ‘감시’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사람에게도 자신이 혼자서만 편안하고 안전하게 존재할, 남과 나를 확실하게 안정적으로 구분하는 경계(境界)가 필요합니다. 어울리는 시간도 필요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성찰과 성장에 중요합니다. 관계 유지와 홀로 있기의 균형을 잡아야 삶이 풍족해집니다.

나와 남 사이, 남과 나 사이에서 거리를 적절하게 지켜야 서로의 공간을 지킬 수 있습니다. 차량과 차량 사이에 거리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접촉 사고, 아니면 대형 사고가 납니다. 경계가 무너져서 불편해진 마음과 몸이 긴장한 결과로 소통에 지장이 생기면 ‘접촉 사고’, 생존에 위협을 느껴서 도망가거나 싸우려고 하면 ‘대형 사고’입니다.

피분석자가 평소처럼 분석용 긴 의자에 눕지 않고 의자에 앉아 분석가의 얼굴을 마주 보겠다고 고집한다면, 언제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분석 상황을 피하고 싶은 욕구로 갈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분석가가 자신의 마음에 너무 가까이 다가와서 간섭, 침범할 것 같은 두려움을 이해, 공감하고 다뤄야 합니다.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도 반드시 분석가를 멀리하려는 마음은 아닙니다. 가까워지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분석에서 ‘거리 읽기’는 진단, 치료에서 모두 중요합니다. 인생의 근본도 ‘거리 조절’입니다. 욕구, 소망, 감정은 거리의 길이로 은밀하게 표현됩니다.
#경계#침범#거리 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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