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없이 맑은 밤, 휘영청한 은빛 달빛, 이럴 때 술은 가득 채워야 제맛. 하찮은 명성과 이익, 부질없이 골머리만 앓았지. 틈서리를 지나가는 빠른 말처럼, 부싯돌 불꽃처럼, 꿈속의 나 자신처럼 짧디짧은 인생이 한스럽구나. 가슴속에 품은 뜻, 그 누구와 터놓고 나누랴. 느긋한 마음으로, 맘껏 천진난만을 즐기는 수밖에. 어느 때면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살아갈까. 거문고 하나, 술 한 주전자, 개울에 비친 구름 한 조각 마주하면서. (淸夜無塵, 月色如銀. 酒斟時·須滿十分. 浮名浮利, 虛苦勞神. 歎隙中駒, 石中火, 夢中身. 雖抱文章, 開口誰親. 且陶陶·樂盡天眞. 幾時歸去, 作個閑人. 對一張琴, 一壺酒, 一溪雲.)
―‘행향자(行香子)·마음을 토로하다(술회·述懷)’ 소식(蘇軾·1037∼1101)
개혁파와의 알력으로 온갖 신산(辛酸)을 맛보았던 시인, 그 소외감을 술과 호방한 기질로 애써 감추려 한다. 세상 명리에 매몰되었던 지난날이지만, 시인에게는 못다 이룬 ‘가슴속 품은 뜻’이 한가득 맺혀 있다. 젊은 시절부터 다져온 웅지이자 신념이다. 하나 세월은 바삐 흐르고 시계(視界)는 몽롱한데 내 뜻을 토로할 지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인이 진정 자신의 고뇌가 다 부질없다고 생각했을까. ‘느긋한 마음으로, 맘껏 천진난만을 즐기기로’만 다짐했다면 진작 훌훌 다 털고 낙향하지 않았을까.
지방관을 전전하며, 때로 투옥되고 유배되는 등 부침(浮沈)이 유별났던 시인. 말년에는 멀리 해남도(海南島)까지 밀려났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하게 살’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행향자’는 곡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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