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식적 행복 뒷면의 고통을 보라… ‘비정상적 가족사진’의 경고[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10일 22시 57분


〈92〉가족의 이면 담은 가족사진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 비극… 정상성 요구라는 억압 폭로
가족사진은 정상성 집착 상징… 위장된 행복을 거실에 진열
과시 거부하는 사진엔 진실이…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어찌 보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한 여자가 조용히 미쳐가는 이야기다. 왜 미치는 것일까? 무엇이 미치게 하는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겪은 폭력적 경험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그런 경험과 기억은 수면 밑에서 그녀의 마음을 착실하게 갉아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것들은 수면으로 올라왔을까. 무엇이 광기(?)의 트리거였을까. 일견 별다른 사건이 없었기에 아마도 일상을 같이하는 남편이 한몫했을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채식주의자’는 처음부터 남편의 캐릭터를 묘사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인다. 변변찮은 자신을 사회에 잘 적응시켜 살아가는 소시민. 그가 현재의 아내와 결혼한 이유는 꽤 분명하다. 특별한 매력도,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과분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던 그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이는 그녀와 결혼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러한 선택에 걸맞게 단조로운 결혼생활이 이어졌으나 “애초에 열렬히 사랑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권태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자, 남편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이 지점에서 독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도대체 남편이 뭔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의견부터 남편이야말로 문제의 근원이라는 의견까지. 실제로 남편은 부인이 전과 달라지자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을 버리는 것처럼” 이혼하며, 처가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비열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대의 피해자는 나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다 압니다.”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상성을 수용하고, 또 그러한 정상성을 사회 속에서 연기하는 데 만족할 독자라면 아내보다는 남편에게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친밀성에 대한 열망 혹은 더 깊이 있는 관계에 대한 갈구가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내면에서 솟는 깊은 열망이 좌절되며, 정상성의 요구는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억압이 되니까. 그러나 남편이 원했던 것은 정상성뿐이었다. 남편은 직장 상사와의 회식 자리에서 아내가 정상 부부를 연기하는 데 실패하자 좌절한다. “그녀의 머릿속이, 그 내부가, 까마득히 깊은 함정처럼 느껴졌다.”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가족 관계도 이처럼 소리 없이 망가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 고장 난 부분을 드러내는 순간 사회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회사에서 남편 쫓겨나는 꼴 보고 싶어?”

이 사회에서 튕겨 나가지 않으려면 정상인 행세를 해야 한다. 이런 정상성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것이 가족사진이다. 거실에 흔히 놓여 있는 바로 그 가족사진. 그 사진에는 예외 없이 가족들이 말쑥하게 옷을 차려입고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행복해’라고 말하는 미소를 짓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워’라고 말하듯 서로를 밀착시키고 있다. (혹시 사진관에 오다가 싸우지는 않았겠지?) 물론 그 사진만큼이나 행복한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 이상으로 행복한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 사진을 찍는 행위가 자아내는 특유의 행복감도 존재한다. 그러나 대다수 가족이 그렇다고 보기에는 한국 근현대사가 너무 참혹하다. 어디 한국뿐이랴. 이웃 나라의 예술가 기타노 다케시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 바로 가족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행복한 가족이라면 모르겠는데, 왜 행복하지 않은 가족마저 가족사진을 찍는가. 왜 슬피 우는 대신 “치즈” 하며 입꼬리를 올리는가. 왜 그 가식적인 사진을 거실에 진열하는가. 그것은 정상성을 구매하는 행위가 아닐까.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첫머리에서 행복한 가족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하다고 한 것처럼, 가족사진은 모두 비슷하게 정상적이지만 실제 가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비정상적이다.

미국의 사진가 메리 엘런 마크가 촬영한 홈리스 가족사진. 사진 출처 워드프레스닷컴 홈페이지
미국의 사진가 메리 엘런 마크가 촬영한 홈리스 가족사진. 사진 출처 워드프레스닷컴 홈페이지
이처럼 보편적(?)이며 정상적(?)이며 과시적인 가족사진을 거부하는 세 장의 사진이 있다. 먼저 미국의 사진가 메리 엘런 마크가 찍은 사진을 보자. 아무도 미소를 띠고 있지 않지만, 지극히 가난해 보이지만, 이들의 표정이나 몸짓은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범주에 굳이 자신을 끼워 맞추고자 하지 않는 홈리스 가족이다.

일본 사진가 후카세 마사히사가 찍은 가족사진. 사진 출처 foam 홈페이지
일본 사진가 후카세 마사히사가 찍은 가족사진. 사진 출처 foam 홈페이지
반면 일본의 사진가 후카세 마사히사는 중산층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을 찍는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이들은 모두 뒤로 돌아서 있다. 이것은 사진가가 그들의 뒤를 찍은 것일까. 아니면 가족들이 통상적인 가족사진을 거부하며 돌아선 것일까. 게다가 뒤에서 본 이들의 옷매무새는 그다지 단정하지 않고 심지어 한 사람은 웃옷을 모두 벗고 있기조차 하다. 벗은 그녀는 이 가족 안에서 어떤 존재였을까. 뒷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과시와 거리가 멀다. 뒷모습을 볼 때 우리는 그저 관람객이 아니라 목격자가 된다. 통상적인 가족사진을 통해서는 도대체 볼 수 없던 가족의 이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된다.

서울 전시 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전의 가족사진. 사진 출처 서울 전시공간 ‘피크닉’
서울 전시 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전의 가족사진. 사진 출처 서울 전시공간 ‘피크닉’
끝으로 서울의 전시 공간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는 ‘우에다 쇼지 모래극장’으로 가보자.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가족사진은 관람객들을 현실의 가정이나 동네 사진관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모래 언덕으로 데려간다. 현실의 흔적이라고는 죄다 소거된 듯한 기이하고 미니멀한 공간. 어떤 정상성의 압력도 뒤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공간. 그 공간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간에 거리를 충분히 유지한 채로 저마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들은 현실을 사는 가족이라기보다는, 이제 가족이기를 멈추고 저 멀리 떠나는 이들처럼 보인다. 그들이 관람객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현생의 희로애락은 이제 충분해요.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부디 잘 지내요.
#가족#가족사진#한강#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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