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유독 늘어난 N수생 여러분, 특히 수고 많으셨어요. 저도 재수를 해봐서 N수생의 심정을 알아요. 똥을 싼 것도 아니고 안 싼 것도 아닌, 빼도 박도 못한 찜찜한 기분 속에서 살았으니까요. 성인이면서도 여전히(아니 영원히) 청소년인 것 같은, 돌아버릴 인지부조화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수능 마친 N수생이 볼만한 최신 청불 영화를 골라봤어요.
①가여운 것들=그리스 출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중 가장 덜 불편한 축에 속해요. 베니스 영화제 최고상 수상작. 남편의 학대를 못 이긴 여성 ‘벨라’(에마 스톤)가 임신 상태에서 강물에 뛰어들어요. 천재 의학자 ‘갓윈’(윌럼 더포)은 숨진 그녀의 뱃속에 있던 태아의 뇌를 꺼낸 뒤 벨라의 머리에 이식해 그녀를 부활시키죠. 매혹적인 육체와 갓난아기의 뇌를 가진 이 아연실색 경천동지 기절초풍할 인간은, 뭇 남자들이 바라 마지않던 이상적 여성이에요. 섹스에 굉장한 호기심을 느끼는 직진본능 그녀는 아무하고나 자니까요. 놀랍게도, 남성지배사회의 억압 기제를 알 턱이 없는 벨라는, 자유 섹스를 통해 오히려 수컷들을 심리적 노예로 만들어요. 점차 뇌가 어른의 것으로 성장하면서 지성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로 진화해 간단 얘기죠. 페미니즘 시각으로 이 영화를 재단하는 건 편협해요. 자유의지의 아름다움이 진짜 메시지죠. 의대 지망생들에게, 특히 요즘 씨가 말라간다는 외과의가 되겠다는 상서로운 계획을 품은 분들께 꼭 추천해요. 외과의에게 필요한 건 비단 손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이니까요.
②돼지와 뱀과 비둘기=넷플릭스에 공개된 대만 범죄영화예요. ‘미친놈’으로 악명 높은 깡패 ‘천쿠이린’은 조폭 회장의 장례식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숨어 지내요. 그러다 폐암 말기란 사실을 알게 되고, 자수하러 경찰서를 찾죠. 그러나 경찰서 벽에 붙은 지명수배범 전단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요. 세상에나! 자신이 대만 3대 지명수배자 중 1위가 아닌 3위에 랭크된 거죠. 범죄인으로서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그는, 지명수배 1, 2위를 제거하러 나선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에요. 이런 미친놈 같은 영화를 왜 추천하느냐고요? 주인공이 이런 용솟음치는 경쟁심을 가지고 공부했더라면, 아마도 이번 수능에서 원점수 297점을 받아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것임이 분명해요. N수생 여러분, 앞으로 여러분에게 펼쳐질 세렝게티 초원 같은 삶의 진짜 여정은, 공부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하진 않아요. 공정하지도, 타당하지도, 능력만큼 인정받는 것도 아니죠. 생각해 보세요. 신기(神技)에 가까운 거짓말 능력과 철면피를 장착하고도, 성공하지 못하는 정치인도 많잖아요? 줄을 잘못 서서요. 수려한 외모와 압도적 연기력으로도 뜨지 못하는 배우는 대한민국에 1000명쯤 돼요. 기회를 못 잡거나 작품 운이 없어서요. 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일로매진 잔인무도하게 살아도 ‘업계 1등’은 요원하잖아요? 그나마 수능이, 세상에 남은 몇 안 되는 공정한 게임임을 받아들이고 깊이 위로 받자고요.
③정년이=‘19금’도 아니고 영화도 아닌 TV 드라마를 왜 추천하느냐고요? 올해 제가 본, 가장 스트레스 받은 작품이라서예요. 수능으로 받은 스트레스는 정년이가 선물해주는 특급 짜증으로 태풍처럼 날려 버리자고요. 제목부터 정년이의, 정년이에 의한, 정년이를 위한 이 드라마는, 비운의 명창인 어머니를 둔 천재 소리꾼 정년이가 시골에서 혈혈단신 상경해 여성국극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고단하고 영웅적인 여정을 다뤘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엔, 이 작품 속 최고 빌런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정년이예요. 정년이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의 ‘룰 브레이커(rule breaker)’죠. ‘춘향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연구생 주제에 자신만의 방자 캐릭터를 찾겠다면서 매란국극단을 뛰쳐 나오는 바람에 공연 직전 일주일간 단체 연습에서 빠져요. ‘자명고’ 무대에선 군졸로 나오면서도 즉흥연기를 뽐내는 바람에 극단의 팀워크를 혼돈 속에 빠뜨리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천재 1인에 의해 국극단의 전통과 규율이 무너지고, 단장부터 말단 연구생까지 모든 이가 오직 정년이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이 기기묘묘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정년이가 안 나오는 장면만 되면 시청자의 마음이 도리어 천국의 평온을 되찾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죠.
N수생 여러분. 꿈은 중요해요. 하지만 인생만큼 소중하진 않아요. 찰리 채플린은 ‘라임라이트’(1952년)에서 말했어요. “죽음만큼 피할 수 없는 건 바로 삶”이라고요. 남의 꿈을 침해하지 않고 사는 평범한 삶이, 어쩌면 근사한 꿈을 품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귀중해요. 꿈의 노예가 되지 말아요. 꿈이 내 인생을 유린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요. 진짜 영웅은 천부적 재능만 믿고 유아독존을 생활화하는 자가 아니라, 영화 ‘매트릭스’(1999년) 속 구세주 ‘네오’처럼 자기 능력을 미치도록 의심하고 스스로 만든 고통 속에 살기를 자처하는 자니까요. 삶은 자체로,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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