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지만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정부가 공히 시도한 게 있다. 재정준칙 법제화다. 재정준칙은 나라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채무 비율 등에서 구체적 목표를 수치로 정해둔 규범이다. 정권마다 각론엔 차이가 있지만 진영을 떠나 일단 대통령으로서 정부의 곳간 열쇠를 쥐고 나면 후대에 남겨줄 돈이 남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건 매한가지였을 테다.
2016년 10월 박근혜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45% 이하로 유지하는 내용이 핵심인 재정건전화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건으로 ‘하야’ ‘탄핵’ ‘개헌’ 주장이 어지럽게 쏟아지던 상황에서 논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는 2017년 3월 탄핵으로 막을 내렸고, 법안은 힘을 잃었다.
2020년 12월 문재인 정부도 국가채무 비율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내놨다. 기준 이내로 유지해야 할 국가채무 비율을 법률에서 정하지 않고 시행령에서 정하도록 한 이른바 ‘한국형 재정준칙’이다. 당시는 코로나19에 대응한다며 정부가 공격적으로 재정을 투입하던 때다. 오히려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에서 “왜 하필 지금이냐”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해임해야 한다”는 격한 목소리가 나오며 법안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윤석열 정부는 아예 재정준칙 도입을 국정과제로 내걸었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60% 이내, 관리재정수지는 3%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게 골자다. 하지만 21대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이 사회적기업 등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사회적경제기본법과 연계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자 국회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 스스로가 3% 이내 관리재정수지를 지키지 못하며 야당 설득 명분도 잃었다.
세 정권을 거치며 국회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재정준칙 도입을 미루는 동안 2015년 592조 원 수준이던 국가채무는 지난해 기준 1126조 원으로 8년 만에 534조 원 늘었다. 거의 두 배가 된 셈이다. 같은 기간 국가채무 비율은 35.7%에서 50.4%로 14.7%포인트 올랐다.
낮은 지지율 속 집권 하반기를 맞은 윤석열 정부에선 그동안의 기조와 달리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부쩍 나온다. 세수결손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지지율 하락을 막기 위해 확장재정으로 옮겨가는 건 불가피하다는 여권 일각의 시각도 있다.
시나브로 정부의 지출효율화 기조가 힘을 잃고 있지만, 22대 국회에선 출범 반년이 되도록 재정준칙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최근 들어 “돈을 제대로 잘 써야 한다”며 재정준칙 법제화 촉구를 시작한 정도다. 야당 메아리는 아직 없다.
국회는 표만 바라보며 최소한의 둑을 쌓는 데 주저하고, 정부는 국회 탓만 하며 재정준칙 법제화를 방치하는 동안 한국은 나랏빚을 걱정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물론 정부는 쓸 돈은 써야 한다. 그러라고 세금을 낸다. 하지만 재정준칙이란 안전판이라도 있어야 예산 책정 또는 증액에 앞서 불요불급한 예산이 맞는지 한 번 더 고민하지 않겠나. 나랏빚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는 이 변곡점에서 최소한의 안전판 마련도 외면하면 미래 세대는 지금의 국회와 정부를 두고두고 원망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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