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대문 앞에 와 구걸을 하던 동냥아치가 마당에서 놀던 어린 내게 등을 내밀자 내가 얼른 그 등에 업혔다고
누나들은 어머니 제삿날에 모여 그 오래된 얘기를 꺼내 깔깔거리고 내가 맨발로 열무밭 앞까지 쫓아가 널 등에서 떼어냈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남루한 저녁은 떼쓰는 동냥아치처럼 대문 앞에 서서 나를 향해 업자, 업자 등을 내미는데
정말 나는 크고 둥글던 그 검은 등에 덥석, 다시 업힐 수 있을지
―고영민(1968∼)
시를 읽는 방식은 자유지만 이 시는 다큐로 읽지 않았음 한다. 다큐라면 아동 유괴 미수 사건에 그치고 말 테니. 이 시는 한 아이의 아찔한 순간이나 1970년대 걸인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자잘한 사실들을 다 넘고 넘어서 가자. 이 시는 ‘검은 등’을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것은 저녁이 우리를 찾아올 때 함께 온다. 아주 깊고, 위험하고, 어둡고, 매력적인 ‘검은 등’ 말이다.
막 어둡기 직전은 매우 소란스럽다. 새 떼는 무리 지어 둥지를 찾아가고, 염소와 소도 어서 집으로 데려가라 울어댄다. 다들 제 원천을 찾아가는 그때 나 역시 서둘러야 한다는 느낌이 훅 끼쳐올 때가 있다. 여기가 아니다. 바로 거기다. 거기로 어서 가야 한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를 모른다. 그게 문제다. 그래서 저녁을 바라보고만 있다. 저녁이 밤이 되면 가야 할 거기로 출발하기엔 늦을 테니까.
‘검은 등’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그것을 감각하거나, 그것에 감응하거나, 그것에 매혹된 사람의 일부가 예술가가 된다. 예술가는 늘 여기 없는 것을 보고, 그리고, 희망하는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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