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사람은 박경리 씨. 안 빗고, 안 지진 머리. 신경만이 살아 있는 듯한 피부. 굵은 회색 스웨터 바람. 검은 타이트 치마. 여학생같이 소탈했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
번역가이자 수필가인 고 전혜린의 책에 수록된 1964년 2월 28일 일기이다. 전혜린의 소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10대에 친구와 함께 나이 지긋한 한문 선생님을 붙들고 “방과 후에 같이 논어를” 배웠으니, 과연 비범한 학생이었다. 논어 공부가 끝이 아니었다. 전혜린은 “철학과 어학(영·독·불·한문·한글)에 대한 광적일 정도의 열렬한 지식욕과 열성”으로 세계 명작을 탐독했다. 책을 읽으며 전혜린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신처럼 숭배”했던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법학에서 독문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1959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전혜린은 번역가, 작가, 교수로 명성을 얻었지만, 친구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대학 시절에 “공일(空日)에는 눈동자가 독서로 인해 깊어져 있는 마음 맞는 벗과 남산에 올라갈 것이다. 제일 높은 곳에서, 서울이, 집이, 사람이 얼마나 작은가를 내려다볼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에워싸고 끝없는 논쟁에 들어갈 것이다”(1953년 9월 3일)라고 일기에 쓸 정도로 전혜린은 줄곧 문학적 우정을 추구하며 살았다. 1965년 1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에도 학림 다방에서 “마음 맞는 벗” 이덕희를 만났다.
전혜린의 일기를 읽으면서 또 다른 친구 한 명을 발견했다. 전혜린은 “멋있는 사람” 박경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만약 전혜린이 지상에 좀 더 오래 머물렀다면, 전혜린과 박경리는 뜻을 나누는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전혜린과 박경리가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에워싸고” 끝없이 논쟁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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