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막 임기 반환점을 돌았지만 관가는 임기 말과 같은 분위기다.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야의 견제로 정책 동력을 상실하면서 “어차피 뭘 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 보신주의가 만연해 있다. 의제 설정, 법안 발의, 국회 및 국민 설득, 정책 집행 등 정책 과정 어디에서도 정부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구호만 그럴듯하고 결실은 맺지 못하는 ‘부실(不實) 정부’를 넘어 아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식물 정부’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임기 초부터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규제 혁신과 연금·노동·교육·의료 개혁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 사실상 멈춰 섰다. 임기 초 출범한 ‘경제규제혁신 태스크포스(TF)’는 지난해 6월 이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경제계에서 규제개혁 과제를 240건 선정해 건의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4대 개혁 담당 부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기는커녕 혹시나 꼬투리를 잡힐까 언론의 취재와 민원 전화를 기피하는 ‘전화 포비아(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한다.
정부와 여당이 의제 설정 능력을 상실하고 야당에 끌려가는 일도 빈번하다. 야당이 법안을 발의하면 정부는 반대한다는 의견 정도만 내거나 거부권으로 버티는 게 전부다. 연초부터 우왕좌왕해온 상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경제계의 우려를 제대로 청취하지 않고 관망하며 10개월을 끌던 금융 당국은 최근에야 “야당 안에 반대한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이렇다 보니 관가에는 ‘책임질 일은 하기 싫다’는 식의 보신주의가 번지고 있다.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 논란이 큰 사업의 경우 정권이 바뀌면 문책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하면서 정책 결정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리는 분위기다. 책임을 미루다 보니 부처 간 조정 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엇박자가 반복된다. 공무원들은 국정과제를 맡은 부처·부서로의 파견을 기피하고, 기회가 되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업무협약(MOU)이나 간담회 같은 보여주기식 행사로 일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
미국 새 정부 출범 등 국제 정세가 변화하면서 경제와 안보에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정부 효율화에 착수하는 등 세계 각국은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혁신 경쟁을 펼치고 있다. 아직 2년 반이나 남은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눕는 것은 한국의 미래 경쟁력을 훼손하는 심각한 역주행이다. 일손을 놓은 정부가 다시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대통령부터 확실히 바뀌고 쇄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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