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이민자 추방 놓고 갈라진 美
비상사태 선포-軍 동원 가능성… 범죄 경력 있는 불법 이민자 체포
최소 1100만 명 추정
“우선 추방은 中남성” 소문 속… “일단 피하자” 망명 신청 급증
민주당 지자체장 “내가 감옥 간다”… 고물가 등 美 경제 타격 우려도
《21일(현지 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중심 도로 뉴욕애비뉴에서 약 5km 떨어진 한 호텔을 찾았다. 간판도 없는 출입구 앞에는 대형 철문이 설치돼 있었다. 200실 규모의 이 호텔은 2022년부터 일반 관광객을 받지 않고 이민자 쉼터로 운영되고 있다. 이 쉼터는 불법 이민을 둘러싼 미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을 보여준다. 텍사스주 등 남부 국경과 맞닿아 있고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주(州)에선 중남미 출신 불법 이민자가 몰려들자 주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강제로 버스에 태워 워싱턴, 뉴욕, 시카고 등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이른바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민자 100여 명을 태운 버스가 ‘이민에 관대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워싱턴 관저 앞에 도착한 뒤 이들을 강제 하차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이 같은 이민자들을 둘러싼 혼란 속에 워싱턴 이민자서비스사무소(OMS)는 결국 이 호텔을 포함한 3곳의 숙박 시설을 영구 임대해 임시 이민자 쉼터를 조성했다. 하지만 쉼터가 문을 열자마자 1200여 명의 이민자가 몰려들어 운영 7개월 만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다른 곳의 이민자 수용 시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내년 1월 20일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즉각 불법 이민자를 대규모로 추방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이를 위해 현 수용 시설을 2배로 늘리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미 곳곳의 민간 교도소 등을 수용 시설로 활용해 불법 이민자를 단속하고 수용한 뒤 미국 밖으로 보낸다는 계획이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까지 동원해 대규모 추방 작전에 나서겠다고 선언하면서 이민자들의 추방 공포는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일부 지역에선 “불법 추방에 저항할 것”이라고 반발하는 등 불법 이민 정책을 둘러싼 미 사회의 분열이 격화되고 있다.
● 취임 첫날 추방 행정명령
올 2월 조지아주의 여대생 레이큰 라일리는 베네수엘라 출신 불법 이민자 호세 이바라에게 살해됐다. 트럼프 당선인은 20일 이바라에게 종신형이 선고되자 소셜미디어(SNS) 트루스소셜에 “국경을 지키고 범죄자와 폭력배를 몰아낼 때”라고 썼다. 불법 이민자 대규모 추방 의지를 재확인한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18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불법 이민자 추방을 위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SNS 글에도 “진실(True)”이라는 답글을 달았다. 미 대통령은 1976년 제정된 ‘국가비상사태법’에 따라 국가안보나 공공안전에 중대한 위협이 발생하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또 대통령, 50개 주 주지사는 주 방위군을 치안 활동에 동원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과 2기 내각은 이미 대규모 추방 준비에 들어간 상황이다. NBC방송은 당선인 측 관계자를 인용해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첫날 최대 5건의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한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민 문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최우선 과제”라며 “선거 공약을 빠르게 이행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대대적인 쇼가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2기 행정부의 불법 이민자 추방을 주도할 ‘국경 차르(총괄 책임자)’로 지명한 톰 호먼 전 이민세관단속국(ICE) 국장 직무대행은 최근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의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트럼프 2기 행정부 첫날 ‘충격과 공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범죄 경력이 있는 불법 이민자를 우선적으로 단속하고, 이들의 불법 취업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사업장 단속도 벌이겠다고 밝혔다.
● 불법 이민자 공포 확산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현재 미국 내 이민자는 약 4590만 명. 이 중 23%인 약 1100만 명이 불법 이민자로 추정된다.
트럼프 당선인이 첫 임기 때보다 강력한 불법 이민자 대책을 예고하면서 미국 내 이민자들의 추방 공포는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이 5일 대선에서 승리하자마자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한 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이 크게 늘었다. 망명이 승인되지 않더라도 심사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추방을 피하기 위해서다. 미 시민권자와의 결혼을 서두르는 이민자들도 늘어났다. 또 영주권이 있는 이민자들의 시민권 취득 문의도 잇따르고 있다.
특히 미국 전역의 차이나타운에는 군 복무 연령의 중국인 남성 이민자들이 최우선 추방 대상이 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16일 NBC방송 또한 당선인 측 관계자를 인용해 “국가안보 위협에 따라 불법 체류 중국인들이 첫 추방 대상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당선인도 이번 대선 유세 중 “군 복무 연령인 불법 이민자들이 중국에서 오고 있다”며 “이들은 미국에 군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9월 10일 대선 TV토론 당시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로 이주한 아이티 이민자들이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렀다. 이후 아이티 이민자들도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시 자신들이 집중 단속 대상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 당선인 측은 또한 내전을 피해 미국에 입국한 아이티 이민자들이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거주하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임시보호지위(TPS)’ 프로그램도 종료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스프링필드 등 미국 내 아이티 이민자 밀집 지역에서는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 민주당 지자체장 “용납 불가”
민주당은 이 같은 계획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당 소속 주지사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있는 이른바 ‘블루 스테이트’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불법 이민자 강제 추방을 두고 극단적인 갈등을 벌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민주당 소속인 케이티 홉스 애리조나 주지사는 19일 ABC방송 인터뷰에서 “지역 사회에 해를 끼치고,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잘못된 정책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당선인 측과의 정면 대결을 예고했다.
콜로라도주 덴버의 수장인 민주당 소속 마이크 존스턴 시장 역시 “대규모 추방에 맞서 감옥에 갈 준비가 돼 있다”며 결사항전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트럼프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는 “그 제안은 수락할 수 있다”고 맞받았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정부효율부(DOGE)는 불법 이민자 추방에 협조하지 않는 주에 대한 연방정부 지원 예산을 우선 삭감하겠다고 경고했다.
불법 이민자 상당수가 미국인이 기피하는 저소득 일용직 노동을 담당한다는 점을 들어 이들의 대규모 추방이 물가 상승 등 경제적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싱크탱크 피터슨연구소는 올 9월 보고서에서 “130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추방되면 2028년까지 미 국내총생산(GDP)이 1.2∼7.4% 낮아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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