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지난 두 번의 정부 부처 출입을 모두 정권 말기에 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지금처럼 20∼30%를 맴돌았을 때다. 당시 관료들의 사무실에는 회색 철제 캐비닛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그때 만난 국·과장들은 “내가 가진 정책 아이디어는 모두 저 안에 쌓아 놨다”는 말을 종종 했다. 어차피 정권의 힘이 빠진 지금은 추진해 봐야 빛을 볼 수 없으니, 새 정부가 출범하면 그때 들이밀기 위해 아껴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관료들이 모인다는 기획재정부는 딱히 이렇다 할 정책을 내놓지 않았고 휴가자가 많은 사무실은 빈자리가 많아 개점휴업을 방불케 했다.
임기 3년 차에 벌써 심각한 복지부동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제 상황은 공무원들이 바닥에 배를 깔고 시간만 보내거나 선거판을 기웃거릴 정도로 한가한 시절은 절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전주곡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 거대한 외풍이 몰아쳤다. 2012년은 우리 경제의 생산성이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최악의 경기침체 국면에 돌입했던 시기다. 낮은 정권 지지율이나 국회 상황을 핑계로 관료들이 일손을 놓기는커녕 비상등을 켜고 밤낮없이 일해도 부족했을 때였다. 당시 공무원들이 아예 기본적인 일조차 안 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임기 말 분위기에 휩쓸려 규제 완화나 경제 구조개혁 같은 주요 현안에 소극적으로 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공직사회 복지부동의 폐해를 감안하면 고작 3년 차에 접어든 현 정부에서 벌써부터 정권 말 풍경이 관찰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극심한 여소야대로 인해 “어차피 뭘 해도 안 된다”는 무기력증, 핵심 국정과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다가 다음 정부 때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정권의 이례적인 ‘조기 식물화’를 부추기고 있다. 간부들의 자신감 결여는 조직 전체로 전염되며 능력 있는 MZ 사무관의 공직 이탈로 이어진다. 낮은 급여를 참고 조국에 기여한다는 사명감으로 버티라는 조언은 공무원 사회에서 꼰대 발언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물론 이런 요인들이 관료들에게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원인은 될 수 있어도 그 자체로 복지부동의 면죄부가 될 순 없다. “국회 권력이 너무 커졌다”, “요즘 젊은 공무원들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10, 20년 전에도 나왔던 얘기들이다.
정책 주도권 되찾고 실용적 성과 보여줘야
공무원들이 캐비닛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잠수 타는 것의 피해는 오롯이 국민의 몫이다. 공직자의 기강 해이는 각종 비리와 안전사고로 이어져 국민의 소중한 인명·재산 손실을 일으킨다. 글로벌 경쟁에 일분일초가 아쉬운 기업들은 집권 초 약속했던 규제 개혁이 2년 반 넘게 공전하면서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 레임덕의 가장 현실적인 정의는 미래 권력의 눈치를 살피면서 정작 지금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이다. 공무원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다음 정부로 넘기는 현상이 앞으로 2년 이상 더 지속된다고 상상해 보라. 당장 미국에서 일론 머스크를 모셔와 공직 개혁의 칼춤을 추게 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른 동면에 들어간 관료사회를 깨우려면 정권이 최소한의 지지율을 다시 회복하는 게 필수다. 그런 반전이 자화자찬식 민생토론회와 정책 홍보, 또는 대통령의 분노를 듬뿍 담은 기강 잡기로 과연 가능할까. 그보다는 국민적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진 민생 아이템을 발굴해 야권과 조금씩이라도 합의를 해나가는 식으로 실용적인 성과를 계속 쌓아가는 게 이 정부의 유일한 살길이라 본다. 정부가 불리한 정치 구도에서도 정책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그런 변화를 국민도 충분히 체감하기 전까지는 관료들이 자기 방 캐비닛 문을 자발적으로 여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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