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인사이트]격변기, 왕의 빈틈 메웠던 현명한 신하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28일 23시 00분



조선의 16대 왕이었던 인조(仁祖)는 무능한 왕이었다. 다행히 신하 복은 많았다. 최고 리더인 왕이 무책임과 무능으로 일관하고 오락가락하는 행보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지만 나라의 버팀목이 된 ‘사우(四友)’가 있었기에 조선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사우’는 조익(趙翼), 이시백(李時白),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를 가리킨다.

사우는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조정의 핵심으로 진입했다. 반정의 공로로 정사공신 1등과 완성군에 봉해진 최명길은 이후 대제학, 육조판서, 삼정승을 두루 역임했다. 이시백은 서생의 신분으로 반정에 참여해 2등 공신과 연양군에 봉해졌고 인조 대에 병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를 맡아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장유도 정사공신 2등과 신풍군에 녹훈됐는데 문장 실력이 뛰어나 대제학을 두 번이나 맡았다. 조선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대문장가를 일컬어 ‘상월계택(象月谿澤)’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 ‘계’가 장유다. 마지막으로 조익은 반정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인조반정으로 이조 좌랑에 등용된 후 대사성과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거치며 활약했다.

사우는 서인의 정통 본류에 속한다. 조선에서는 어떤 학통을 이었느냐, 누구의 제자냐가 정치적 힘을 좌우한다. 사우는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우계 성혼(成渾)과 사계 김장생(金長生), 서인의 거물 정치가 월정 윤근수(尹根壽)와 사제 관계로 연결돼 있다. 서인 정권에서 활동하는 데 최상의 백그라운드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우의 경쟁력은 학문적, 실천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우선 사우는 모두 문장에 능했다. 장유와 최명길이 당대 최고의 문장가만 맡을 수 있는 대제학을 지냈을 정도다. 특히 사우는 공개적으로 문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문장을 배울 교범으로 한나라 학자들의 글과 장자(莊子)를 거론했다. 둘 다 성리학에서 배척하는 대상이다.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중시한 것이다. 둘째, 사우는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다. 양명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학문이다. 객관 세계의 이치 탐구를 중시했던 성리학에 비해 양명학은 마음을 중심으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여겨 왔는데 장유와 최명길은 양명학에 호의적이었고, 이시백과 조익도 양명학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조선이 겪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덕 원칙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현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창조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이를 주도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이라고 이들은 봤다. 세 번째, 사우는 권도(權道)를 중시했다. 권도는 보편적인 가치 규범인 경도(經道)를 현실에 적용할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임시변통의 방법이다. 다만 권도의 시행 여부는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따르기 때문에 일찍이 주자는 권도의 오남용을 경계하며 성인(聖人)만이 행할 수 있다고 제한한 바 있다. 하지만 사우는 권도를 적극 주장하며 국정을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특히 이들은 ‘정치가의 책임 윤리’라는 측면에서 권도의 사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하며 의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낫다는 척화파의 말은 필부의 절개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비록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더라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상으로 살펴본 사우의 특성은 거대한 전환기를 맞아 불확실성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데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선 기존의 논리나 관행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시대의 변화를 주시하는 가운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진리라고 믿어 온 것일지라도 과감히 벗어나고 혁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다. 비상(非常)의 시대에는 비상(非常)한 방법이 필요한데 다양성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결코 ‘비상한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노력을 성공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마음의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이다. 더욱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격변기에는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어떤 미래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올바른 인식과 판단 능력을 갖춰 놓는 일이 중요하다. 마음의 역량을 배양하는 일에 주목했던 사우의 태도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다.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04호(11월 1호) “리더의 빈틈을 메운 현명한 신하들” 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조선#16대 왕#인조#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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