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다고 생각한 미래는 생각보다 멀었고, 멀었다고 생각한 미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올해 재계 2위 SK그룹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최창원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경영진에게 해온 말이다. 손에 잡힐 듯했던 전기차 붐은 대중 시장 침체로 다시 멀어진 반면에 영화 속 아이언맨에게나 있을 줄 알았던 인공지능(AI)은 2024년의 한국 산업계를 내내 끌고 다녔다.
또 한 번의 연말을 맞으며 산업계 그 누구도 1, 2년 뒤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지난주엔 유럽 최대 전기차 배터리 기업인 노스볼트가 파산하면서 여기에 투자했던 골드만삭스와 폭스바겐도 1조 원이 넘는 손실을 보게 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이 사실을 전하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조달한 스타트업이었던 노스볼트는 이제 일주일 치 운영 자금과 8조 원의 빚만 남았다”고 보도했다.
국내 주요 그룹들도 한국 첨단산업의 주요 두 축인 배터리와 반도체에서 희비가 극명하게 갈리는 한 해를 보냈다. 배터리 3사의 북미 공장 계획 발표가 한창이던 지난해 5월만 해도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미국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매년 평균 63%씩, 유럽은 30%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업체에서 올해 9월까지 집계한 글로벌 배터리 시장 성장률(중국 제외)은 12.5%에 그친다. 반면 지난해 3분기까지 삼성, SK 모두 조 단위 적자에 허덕였던 메모리 산업은 올해 AI가 거세게 이끄는 반도체 붐을 맞았다.
기업의 물밑에 있었던 장면들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낸다. SK하이닉스가 10조 원을 주고 인텔로부터 인수해 온 낸드플래시 부문(현 솔리다임)이 지난해 4조 원의 적자를 내자 내부 경영진은 투자 최종 책임 소재를 서로 미루느라 바빴다. 기존에 갖고 있던 키옥시아 낸드 생산라인조차 개점휴업 상태가 되자 이를 고대역폭메모리(HBM) 라인으로 바꾸자는 방안도 논의됐다. 하지만 불과 한 해 뒤인 올 들어 AI 서버 시장이 만개하자 낸드 사업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최태원 회장은 직접 솔리다임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불과 1년 전 오늘 누구도 배터리와 반도체의 이 같은 교차를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변화의 파도가 닥쳤을 때 생존과 도태의 법칙은 늘 똑같다. 좌초 위기에서 생존하려는 기업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유연하게 방향타를 돌려야 한다. 과도하게 적재된 화물은 던져야 하며, 고박(固縛·화물을 묶음)이 약했던 곳은 없는지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아 또다시 파도 속으로 나가야 하는 기업들의 두 번째 기회를 받쳐 주는 게 정부, 국회의 역할이다. 반도체는 그나마 여당이 당론으로 특별법이라도 추진 중이지만, 지금 파고를 견뎌야 하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적자 속에서 법인세 감면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최대 경쟁사인 중국 CATL은 상반기에만 7000억 원이 넘는 보조금을 등에 업고 무섭게 성장 중이다.
테슬라 출신인 노스볼트의 최고경영자(CEO) 칼슨은 사임하면서 정치인, 기업, 투자자들에게 “녹색 전환을 두려워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음에 우리에게 다시 기회가 왔을 때 “멀게 생각한 미래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고 한탄하지 않으려면 지금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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