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비겁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으며, 영웅에게는 영웅이기를 그만둘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법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적인 앙가주망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
‘앙가주망’은 참여를 뜻한다. 그러나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한 인간이 자신의 상황에 대면해 자신의 전적인 책임을 의식하고 어떤 행동을 할 것을 결심하는 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은 개인만의 일이 아니라 그 선택을 통해서 결혼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긍정하는 일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을 열었던 1945년은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인간의 이성과 존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상태였다. 사람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을 근간으로 한 실존주의에 대해 ‘그렇다면 인간에게 무엇이든 허용되었단 말인가’ 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무한한 자유가 부도덕한 쪽으로 흐를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말에 반박하며 실존주의의 의미를 되짚는다. 실존주의는 곧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말은 모든 선택에 나의 전적인 책임이 따른다는 말과 같다.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자유를 두려워한다. 정답 없는 무수한 선택지가 앞에 놓였을 때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자유라는 선물을 한시바삐 넘겨줄 대상을 찾는다고 적은 바 있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평균의 삶에 집착하고 정답의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구는 것이 아닐까.
사르트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은 과연 어떠한 형태인지, 내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생각할 것을, 그러기 위해선 주어진 환경에 대해 변명하지 말고 어떻게 ‘참여’하며 살아가야 할지 결심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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