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만난 76세의 프랑스인 원로 학자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전쟁이 터질까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8년에 태어나 전쟁을 모르고, 그렇기에 경험 못 한 전쟁이 더욱 두렵다는 이야기였다. 이때는 북한군이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 파병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무렵이었다. 유럽인들은 ‘먼 나라’ 북한의 군인 1만여 명이 유럽 대륙에 진입했다는 소식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러시아가 북한의 지원에 힘입어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주변 유럽 국가들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주프랑스 한국대사관과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IFRI)가 마련한 북한 인권 세미나에서도 전문가들은 “이제 북한 문제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제가 됐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럽, 자국민에겐 강하고 구체적인 경고
더욱 뚜렷해진 전쟁 위협 속에 유럽 국가의 수장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우선 대내적으론 강한 어조로 확실하게 위험을 공유한다. 유럽의 안보를 책임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지난달 6일 낸 성명에서 “북한군이 유럽 영토에 있다는 점은 확실히 역사적”이라며 “우린 이미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닥친 파괴보다 훨씬 더 어두운 무언가의 위기에 처해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북한군 파병의 엄중함을 강조하면서 우크라이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경고한 셈이다.
유럽 수장들의 대내적인 메시지는 강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나토의 군사위원회 의장인 로프 바우어르 네덜란드 제독은 지난달 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유럽의 기업들을 향해 전시 상황에 대비해 생산과 유통 방식을 조정할 것을 촉구했다.
유럽 국가들은 국민들에게도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알리고 있다. 200년 넘도록 중립 노선을 이어오다 올 2월 나토 회원국으로 합류한 스웨덴은 지난달 ‘위기·전쟁 시 행동 요령’이란 제목의 32쪽 분량의 책자를 각 가정에 발송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1340km의 국경을 맞댄 핀란드도 다양한 위기 상황에 대비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개설했다.
러시아엔 모호한 발언, 자극 피하기
자국민들에게 직설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향해선 오히려 간접적이고 모호하게 발언한다.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크라이나가 지난달 20일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장거리 미사일 ‘스톰섀도’로 러시아 본토를 처음 타격했을 때 영국 정부는 타격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외신들이 일제히 타격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와중에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작전상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만 승자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휴전 중인 북한과 국경을 맞댄 한국은 북한이나 러시아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이 북한군 파병 사실을 확인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에 러시아는 양국 관계가 파괴될 수 있다며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반면 국민과 기업을 향해 전쟁 위험을 어떻게 준비하자는 목소리는 뚜렷이 들리질 않는다. 전쟁을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는 없지만 북-러 군사 공조로 지정학적 위험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만큼 우리도 내부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소통하고 외부적으론 외교적인 수사에 더욱 노련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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