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382조4000억 원. 최근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15%로 적립금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기까지 채 5년이 안 걸렸다. 최근 발간된 자본시장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 퇴직연금 적립금은 국민연금 기금(1755조 원) 규모를 뛰어넘는 최대 206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돈은 잘 굴리고 있을까. 퇴직연금 적립금의 최근 10년 평균 투자수익률은 2.07%에 불과했다. 증시 호황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낸 지난해에도 5.26%에 그쳤다. 마찬가지로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경우 장기 수익률이 연평균 5.92%이고 지난해엔 13.59%였다. 국민연금 정도로만 투자해도 현재 2배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성과가 저조한 것일까. 가입자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퇴직연금은 크게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나뉜다. 계약형은 가입자가 민간 금융기관인 퇴직연금 사업자와 직접 계약을 맺고 스스로 투자 상품을 선택해 적립금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기금형은 국민연금처럼 투자전문가 집단이 가입자를 대신해 적립금을 관리하면서 기금을 만들어 투자하거나 민간 금융기관에 투자를 위탁한다.
문제는 계약형의 경우 투자 정보가 부족한 가입자들이 원금마저 잃지 않기 위해 은행예금 등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상품에 주로 투자하고 장기간 방치하기 일쑤란 점이다. 국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투자 비중은 90%에 가깝다. 저조한 수익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반면 기금형은 가입자들이 장기간 방치하더라도 전문가들이 주식, 대체상품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기금의 덩치가 커질수록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수익률을 더 높일 수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주식과 대체투자에만 적립금의 63.3%를 투자했다. 다만 퇴직연금이 대체로 기금형으로 운용되는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는 30명 이하 사업장에 한정된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을 빼면 기금형 퇴직연금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해외 모범 사례도 있다. 호주의 퇴직연금은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묶어 운영하는 기금형인데, 가입자들이 수익률에 따라 다른 기금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탁법인 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2022년 기준으로 10년 투자 수익률이 연평균 7.2%로 맥쿼리 같은 대기업 등 직장인들의 퇴직연금을 모아 운용하는 기금만 12개다. 호주 정부는 가입자가 투자 결정을 하지 않더라도 ‘평타’ 이상의 수익률을 내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에 가입할 수 있게 하고 관리 감독과 공시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2005년 12월 시작된 퇴직연금 제도는 내년 20주년을 맞는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올해 8월 취임한 뒤 기금화 등 다양한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국민연금공단에 퇴직연금 사업자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다만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까지 위탁 운용하는 시스템은 공공 영역의 과밀화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직장인이 원하는 것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금화를 포함한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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