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12월 3일 ‘조선어연구회’가 창설됐습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과 우리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헌신한 이 단체의 중심에는 외솔 최현배 선생(1894∼1970·사진)이 있습니다.
최 선생은 어린 시절 한문을 익혔지만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에서 주시경 선생을 만나 국어학과 국어문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유학을 마친 그는 약 2년간 부산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직접 교재를 집필했습니다. 이 교재는 훗날 그의 대표작 ‘우리말본’의 초고가 됩니다. 192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에서 교육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26년 귀국한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한글과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1931년 조선어학회 창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참여해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신명균 등과 함께 형태주의 맞춤법을 주장하며 우리말 표기법의 표준을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최 선생은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완성에 앞장섰고 1937년에는 1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우리말본’을 연희전문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습니다. ‘우리말본’은 국어의 어법과 문법, 표준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중요한 성과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그는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돼 해직됐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광복 이후에야 풀려나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한글 보급과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광복 후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꿨고 최 선생은 상무이사로 취임해 한글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국어사전 편찬, 아동용 한글 교과서 집필, 순우리말 쓰기 운동에도 앞장섰습니다.
또 국가 차원의 한글 전용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특히 미군정 자문기관인 조선교육심의회에 참여해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한글 전용과 가로쓰기를 채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어 가로쓰기가 정착된 것도 그의 노력 덕분입니다.
최 선생은 평생 한국어 연구와 한글 교육에 헌신하며 그 기틀을 세웠습니다. 그의 삶과 업적은 지금도 우리가 한글과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고 가꿀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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