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금 같은 소금의 힘[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2일 23시 03분


해안가 신석기인이 지리산 이주한 것도… 산속 고구려인이 동해안에 진출한 것도…
인간 이주의 원동력 된 소금
빗살문토기 바닥이 뾰족한 이유… 소금 결정의 응고 위한 것 추정
안정적 소금 공급 가능해지면서 해안가서 내륙쪽 진출 활발해져
갯벌서 소금 말리는 천일제염법… 明서 시작, 한국선 20세기 도입

바닷가 갯벌 염전에서 만든 소금. 천일제염법은 중국 명나라에서 시작됐으며 한국에는 20세기가 돼서야 도입됐다. 그 전에 한국은 전통적으로 해초에 바닷물을 넣어 말리고 태운 후 염도가 높아진 잿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게티이미지뱅크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소금만큼 우리의 생을 지탱하면서 동시에 푸대접받는 음식은 없다. 인류의 생존에 소금은 필수였고 빙하기 이후 지난 1만 년간 세계 곳곳으로 인간이 이주하는 데에는 안정적인 소금의 공급이 필수였다. 지금 소금은 너무나 흔한 식재료가 되었고, 오히려 각종 성인병의 주범으로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하지만 최근 고고학의 발달로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소금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것을 얻고 교역하면서 문명이 발달했는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우리의 필수품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소금, 그 진정한 의미를 고고학적 자료로 밝혀 보자.

조선시대 염전에서 일하는 인부들. 부산박물관 제공
조선시대 염전에서 일하는 인부들. 부산박물관 제공
지금 소금이라고 하면 흔히 바닷가 갯벌에서 소금을 말리는 염전을 떠올리지만, 정작 이 ‘천일제염법’은 중국의 명나라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는 20세기가 되어서야 도입되었다. 원래 한국은 전통적으로 바닷물의 소금을 구워서 얻었다. 바닷물의 염도는 3.5%로 바로 소금으로 만들기는 낮다. 그래서 바다풀에 소금을 절이는 방법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당시 소금을 만드는 방법은 해초(바닷속 육상풀)에 바닷물을 넣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 그 소금이 붙어 있는 해초를 태워서 재로 만들어 물에 녹인다. 그렇게 염도가 높아진 소금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 최근 부산 낙동강 하구에 에코델타시티를 건설하던 중 명지도에서 조선시대의 염전이 발견되었다.

한대 화상석에 기록된, 2000년 전 바위에서 소금을 캐어 굽는 장면. 타이완 국립역사박물관 제공
한대 화상석에 기록된, 2000년 전 바위에서 소금을 캐어 굽는 장면. 타이완 국립역사박물관 제공
선사시대의 경우는 자료가 많지 않다. 소금은 물에 잘 녹기 때문에 고고학이 쉽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에 신석기시대의 빗살문토기의 독특한 뾰족한 바닥이 소금의 생산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역사 교양서에는 흔히 빗살문토기가 뾰족한 이유를 주로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모래톱에 세우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동해안 지역의 빗살문토기는 바닷가지만 평평한 게 많으니 막연한 추정이다. 한국과 달리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소금을 굽는 제염토기가 발견되는데, 모두 밑바닥이 뾰족하다. 소금의 결정이 바닥에 쉽게 응고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얼마 전 인천 영종도의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빗살문토기를 분석한 결과 소금 성분이 다수 발견되었다. 뾰족한 빗살문토기는 제염에 편리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인천 주안을 비롯한 해안가가 이름난 염전이니, 서해안 염전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소금의 원활한 공급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균형발전(?)을 이루는 데에도 기여했다. 신석기시대 초기에 사람들은 대부분 바다와 강이 만나는 해안가에서 살았다. 소금과 함께 식수도 쉽게 얻을 수 있고 강과 바다의 다양한 동식물을 식량으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 6000년 전부터 빗살문토기인들은 금강 상류나 전북 무주, 진안과 같은 지리산 자락의 깊숙한 내륙지방까지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기에서 바닷가의 해산물 대신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배경에는 소금의 안정적인 공급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쓰촨 쯔궁 지역에서 소금을 굽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중국 쓰촨 쯔궁 지역에서 소금을 굽는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남한과 달리 주변에 바다가 없는 중국이나 유라시아 초원지역 내륙지방은 암염이나 정염(우물에서 짠물을 길어 올리기)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사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해 특히 애쓴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인들은 본래 험난한 압록강변의 울창한 삼림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내륙의 산속에서 성장한 고구려인들은 소금을 어떻게 얻었을까. 그 실마리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주몽은 건국을 한 직후부터 계속 백두대간을 넘어서 동해안 옥저의 정벌을 시도한다. 옥저인들은 고구려인들에게 맥포(貊布)·어염(魚鹽) 및 해중 식물(海中食物) 등을 바쳤다. 두만강 유역 배산임수의 지형에 발달한 평야에서 농사를 지었던 옥저였다. 하지만 정작 고구려에 바친 것은 염장 물고기와 해산물이었다. 내륙에 위치한 고구려인들에겐 소금과 해산물이 절실했다는 뜻이다. 서기 3세기에 조조가 세운 위나라의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그의 최종 목표는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었다. 그는 험난한 백두대간을 넘어 동해안의 옥저 마을을 철저히 파괴했다. 소금과 같은 필수적인 산물의 보급창고였던 옥저를 무너뜨려 고구려의 기반을 완전히 파괴하려 했던 것이다.

소금에 대한 갈망은 고구려인들의 해산물 사랑으로도 이어졌다. 당나라의 기록에는 고구려인들이 고래가 출산 후 미역 먹는 것을 보고 배워서 출산후 미역을 먹는다고 되어 있다. 산모의 미역국이 고구려 기원인 셈인데, 우리나라에서 보통 고래는 동해안에 더 많이 등장한다.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서기 1세기경에 동해안으로 간 고구려인이 왕실에 고래를 바치기도 했다. 옥저에서 시작된 해초류를 먹는 풍습이 고구려에 널리 전해졌다는 뜻이다.

소금을 얻고자 하는 노력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도 건국 직후에 두만강 유역을 장악하고 소금을 굽고 교역을 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 결의를 한 곳으로 유명한 연해주의 한-러 국경 지역에 위치한 ‘연추리’라는 마을이 있다. 그 근처의 바닷가에는 필자가 다년간 발굴하기도 했던 발해의 성터 크라스키노 유적이 있다. 원래 발해의 성 ‘염주(鹽州)’ 자리였고, ‘연추’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발해 시기에 여기에서 소금을 구워서 내륙지역으로 실어 날랐다는 뜻이다. 실제로 19세기까지도 이 성 근처에는 소금가마들이 즐비했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만주 깊숙이 진출하면서 곳곳의 소금을 이용했다. 광개토왕비에도 소금강(염수)이라는 지명이 거란족 근처에서 등장한다. 어딘가를 진출할 때에도 반드시 소금의 원천을 감안하면서 이동했다는 뜻이다. 말갈과 숙신족도 나무를 태워서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아마 염호 근처에서 소금기 많은 풀을 태워서 소금을 얻었을 것이다.

이런 소금가마의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최근 뉴스로도 이슈화되었던 ‘염전노예’도 고구려에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적국을 협박하면서 왕을 ‘염전노예(염노)’로 만들겠다면서 협박할 정도였다. 최근 북한에서는 평양 남쪽의 대동강에서도 대규모 소금가마터가 발견되었다. 화려한 황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이 없으면 곧바로 죽음이었다. 바다와 육상의 험난한 교역로를 따라서 소금이 공급된 “소금의 길”이 없었다면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금이 곧 국력인 셈이었다.

소금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다양한 음식의 발달로 이어졌다. 소금을 다른 지역으로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염장을 하거나 장(醬)류를 만드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특히 콩을 이용한 장이 발달했다. 중국에도 명성을 떨친 고구려의 음식 중에는 맥적(貊炙)이라는 불고기가 있었는데, 아마 장류를 이용한 적절한 양념이 비결이었을 것이다. 한편, 경상도 일대에서는 가야의 여러 고분에서 상어의 뼈가 발견되니, 염장한 상어 고기를 먹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소금을 이용한 장류와 염장 음식은 고염도로 내륙의 사람들에게 나트륨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여 우리의 고대 역사를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성인병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하니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소금인 셈이었다.

최근 세상은 너무나 많은 찬란한 사람과 문화로 넘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언제나 거의 무료로 누리고 있다. 깨끗한 물, 그리고 소금이 그 좋은 예이다. 지금은 천대받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금은 과거에 천금보다 귀한 값어치였고 소금을 향한 갈망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왕자의 구절만큼 소금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소금#염전#역사#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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