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60일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헤즈볼라는 지난해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가자전쟁’이 시작된 다음 날부터 하마스를 지원하며 이스라엘과 충돌했다. 이번 휴전 합의는 416일 만에 이뤄진 것. 아직 포성이 완전히 멈추진 않았다. 국경 지역에선 양측의 소규모 충돌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도 베이루트를 포함해 레바논 전역에서 전개되던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습은 멈췄다. 카이로 특파원 시절 인연을 맺은 현지 지인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는 “휴전이 이뤄져 다행”이라면서도 “안정, 희망, 평화 같은 단어는 아직 레바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전쟁 못지않게 오랫동안 레바논을 괴롭혀 온 문제가 남아 있다는 걸 잘 알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실생활 문제도 해결 못 하는 레바논 정치
많은 레바논 사람들이 자국의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건 ‘주적’ 이스라엘이 아니다. 레바논과 인근 아랍 국가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해 온 이란도 아니다. 그들이 지적하는 레바논의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 갈등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치다.
레바논은 아랍 국가 중 매우 드물게 국교를 이슬람교로 정하지 않았다. 마론파를 중심으로 기독교 인구 비율이 다른 아랍 국가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약 530만 명인 레바논 국민 중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를 믿는 비율은 각각 32.2%와 31.2%였다. 기독교는 30.5%였다.
레바논은 프랑스로부터 1943년 독립한 뒤 종교별 인구 비율을 고려해 대통령은 기독교, 총리는 수니파, 국회의장은 시아파에서 선임해왔다. 종교 간 권력을 나누고, 갈등을 방지하려는 의도다. 문제는 이 같은 정치적 결정이 레바논을 정치와 정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레바논에선 행정부와 입법부의 주요 정책을 둘러싼 협의와 조정 과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 간 입장 차이가 큰 경우가 많고, 상대에 대한 불신도 깊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와 안보 등과 관련된 복잡하고 민감한 내용을 담은 중장기 정책 수립은 시도 자체도 어렵다. 매립지 부족으로 급증한 베이루트의 쓰레기 처리 같은 실생활 문제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해 큰 혼란을 겪었다. 심지어 코로나19 팬데믹 때는 베이루트 남부를 중심으로 많은 지역에서 정부 대신 헤즈볼라가 방역을 주도했다.
헤즈볼라 막을 수 있는 정치와 정책 부재
상황이 이렇다 보니 레바논 사람들의 자국 정치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국립레바논대 사회학 박사인 이경수 한국외국어대 중동연구소 연구원은 “현지인들은 ‘레바논 정치에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갈등과 야합만 있다’는 비판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헤즈볼라 같은 극단주의 성향 무장단체가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이스라엘과 자체적으로 전쟁까지 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레바논의 붕괴된 정치 때문이라는 지적도 많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무력 도발을 감행하고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려도 이를 정부나 의회 등에서 제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지휘부와 군사 역량이 크게 약해졌지만 헤즈볼라가 다시 영향력을 회복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현재 상황이 지속된다면 헤즈볼라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와 정책 역시 없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개방적인 문화와 수준 높은 인력을 바탕으로 한때 ‘중동의 허브’ 역할을 했고, ‘중동의 파리’로 불렸던 레바논을 더욱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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