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거물 된 20대 사업가 박흥식… 화신상회 인수해 백화점으로 개조
‘문화주택’ 한채 경품 행사 등 화제… 1942년엔 일본계 백화점 수준 성장
총독부, 무역 대행 독점회사 지정… 광복후 쇠퇴의 길… 1980년 부도
《종로 화신백화점 50년 흥망성쇠
1920년대에 태어나 평생 서울 사대문 안에서 거주한 한 할머니는 당신이 칠십 평생을 보낸 서울을 이렇게 회고한다. “강남은 남의 나라야. 싫어. 나는 어디 갔다가도 종각 들어와서 화신상회가 보이면 마음이 그냥 안도야. 아이구 이제 나는 걸어서도 찾아갈 수 있고, 그냥 골목도 알 수 있고.”(‘인사동 한정식집 할머니의 생애사’ ‘주민 생애사를 통해 본 20세기 서울 현대사’,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0년) ‘화신상회’는 1930년대 이래 근 반세기 동안 종로의 랜드마크였던 화신백화점이다. (현재 종각역 네거리 종로타워 자리) 원래 화신상회는 전통적인 종로 상인 출신 신태화(申泰和)가 1918년 창업한 귀금속 전문 상점으로 출발했다. 경성의 조선인 귀금속상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라 금은 외에 포목, 잡화 등도 취급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무리한 경영 확대는 화신상회의 발목을 잡았다. 1920년대 말, 세계는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을 때였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박흥식이다. 1903년 평안남도 용강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박흥식은 부친과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개항장 진남포에서 미곡 유통업으로 성공한 그는 1926년 ‘상경’하여 선일지물(鮮一紙物) 회사를 설립했다. 문화통치기 각종 출판이 활발해지면서 종이 수요가 크게 증가하는 데 착안한 사업이었다. 박흥식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1928년 3대 조선어 일간지 중 하나인 시대일보의 용지 독점 공급권을 따내는 한편 조선인 업자로는 드물게 일본어 신문과도 거래를 트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아직 이십대의 나이에 “우내(宇內·온 세상)에 빗나는 소장 재계의 걸물”로 떠오른 박흥식은 마침 화신상회의 주채권자였다.(‘삼천리’, 1933년 10월호) 그는 경영난에 빠진 화신상회에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어 줄 것을 요구했다. 신태화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1931년 박흥식은 주식회사 화신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와 함께 목조 2층의 건물을 증개축하여 화신상회를 명실상부한 백화점으로 개조했다.
그런데 야심만만하게 새출발을 알린 화신백화점 앞에는 수많은 적이 있었다. 미쓰코시나 조지아 등 이미 성업 중인 남촌의 일본계 백화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무렵 화신백화점 동쪽 맞은편에 4층 건물의 동아백화점이 개업한 점이다. 제한된 종로 상권을 두고 두 백화점의 경쟁은 필연적이었다. 만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합병할 수만 있다면 산술적인 사업 확대를 넘어서 ‘종로의 유일한 조선인 백화점’의 프리미엄이 따라올 것이었다. 당시 종로 재계 전체가 주목한 양쪽의 경쟁은 의의로 두어 달 만에 결판이 났다. 화신은 구매 고객에게 현금 교환이 가능한 상품권을 증정하는가 하면 ‘문화주택’(고급 서양식 주택) 한 채를 내건 경품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으로 일관했고, 동아는 견디지 못했다. 1932년 7월 화신은 동아의 상품과 경영권 일체를 매수하고 두 백화점을 구름다리로 연결, 화신 동관과 서관으로 재개점했다.
그런데 1935년 벽두 거칠 것 없는 박흥식의 기세에 일대 위기가 닥쳤다. 구정 대목을 맞아 북적거리는 백화점에 큰 화재가 난 것이다. 이 화재로 서관 전부와 동관 3, 4층이 소실되었다. 박흥식은 오히려 화재를 계기로 애초 계획하고 있던 백화점 신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장안 한복판, 종로 네거리에 6층인가 우뚝 솟은 근대식 건물, 맨 위에는 전(前)세기적인 왕관의 일류미네-슌이 흠실흠실 쉬지 않고 빛나”는 신축 화신백화점을 준공한 것이 1937년 11월이다.(‘삼천리’, 1938년 10월호) 새 단장을 한 화신백화점은 지하층의 식료품부에서 1∼4층의 각종 매장, 5층의 대식당, 6층의 영화관, 그리고 옥상 정원까지 갖추었다. 3대의 엘리베이터는 물론이고 조선에서 처음 설치된 2대의 에스컬레이터는 장안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화신오십년사’, 1977년)
서울 토박이로 자란 아동문학가 어효선(1925∼2004)은 어린 시절에 본 화신백화점을 이렇게 기억한다. “새로 지은 화신에는 승강기가 있고 에스컬레이터도 있었다. 사야 할 물건이 없어도, 승강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손님은 어른보다 아이들이 많았다. 할 일 없는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깨끗이 닦아 놓은 진열장에 손을 대어 더럽히고, 이것저것 만져 보아 흩뜨려 놓기가 일쑤였다. 에스컬레이터는 곤두박질칠 것 같아 타기를 꺼렸고, 승강기는 저마다 타는데, 배멀미를 하듯이 어지러워 하는 이가 많았다. 이 건물에 옥상이 있었다. 6층 지붕 위인데, 여기서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신기했다. 옥상에는 정원을 꾸몄던 것 같다. 5층인가 6층에는 조그만 극장이 있었다. 여기서 ‘수업료’라는 우리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밖에 나와서 이 건물을 쳐다보면 어지러웠다. 그때는 까맣게 높다고들 했다. 6층 꼭대기에 전광판이라는 것이 또 신기했다. 높이 1m에 길이 10m쯤인데, 촘촘히 꽂힌 전구에 불이 켜지고 꺼지고 해서, 글자가 나타나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전광 게시판이라고도 하고, 전광 뉴스라고도 했다.”(어효선, ‘내가 자란 서울’, 2003년)
‘인사동 한정식집 할머니’의 기억 속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식료품부와 대식당이었던 듯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화신백화점 지하실 가면 이 문화적으로 발달된 걸로 해가지고 일본식으로 고로께집, 민찌보루, 민찌보루는 고기 다져서 이렇게 동글동글하게 해서 하나씩 먹게끔, 민찌보루, 슈마이. 슈마이는 고기만두, 고기만두를 잘 빚어가지고 통에다 10개씩 놔서 쪄내는 것, 슈마이. 지하실 가면 그래 가지고 이제 곰보빵 이런 게 있는데, 5층에 가면 고급식당, 거기 가면 시노다 돈부리, 오야꼬 돈부리 뭐 어쩌구저쩌구 한정식 하면 하얀 반상기에 금으로 수복 쓴 것, 그 반상기에다 깍두기 다섯 쪽, 뭐 나물도 요만큼씩 뚜껑 덮어서 얌전히 한 접시씩 나왔댔어.”
신축 화신백화점의 ‘성장’은 눈부신 바 있었다. 1931년 일본계 백화점의 4분의 1에 불과했던 영업세액이 1942년에는 거의 비슷해졌다고 한다. 사업적 성공과 더불어 박흥식은 이른바 실력양성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를 지내는가 하면 발명학회, 과학지식보급회 등에도 고문,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런 활동의 백미는 1935년 초 도산 안창호 가출옥의 보증인이 된 것이다. 안창호는 평안도 출신 실력양성운동의 구심점인 인물이다. 박흥식도 넓은 의미에서 그 자장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민족적 색채를 띠는 활동에 참여한다고 해도 성공한 자본가로서 박흥식은 식민지 권력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는 박흥식을 총애하여 친필 휘호를 써주는가 하면 일부러 화신백화점에서 양복을 맞추기도 했다. 1939년 박흥식은 일제의 판도가 중국 대륙으로, 동남아로 확대되는 데에 발맞춰 화신무역을 설립해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화신무역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급성장해 총독부에 의해 중소기업의 ‘대동아공영권’ 무역을 대행하는 독점 회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토록 필승의 신념 아래 몸을 바치다시피 충성을 다한 박흥식에게 하늘도 무심하게 뜻밖에도 일본이 패하고” 말았을 때, 박흥식과 화신의 전도에는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반민자죄상기’, 1949년)
광복 후 박흥식은 끊임 없이 재기를 시도했지만, 신흥 백화점의 성장 속에서 화신은 옛 영화를 되찾지 못했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백화점은 1980년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1988년에는 도로 확장으로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그러나 경성의 조선인 거리 종로의 우뚝한 랜드마크가 있었던 곳, 수많은 사람의 서울살이의 추억이 쌓여 있는 곳, 일제강점기 조선인 자본가의 성장의 ‘빛과 그늘’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그 자리의 기억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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