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54)이 노벨 문학상 시상식을 위해 스웨덴을 찾은 영광의 주간에 작가의 고국에선 부끄러운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다. 한강의 대표작 중 하나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 평가받은 작품이다. 45년 전 계엄 사태에 천착해 온 작가에게 외신 기자들은 6일 기자회견에서 2024년 또다시 계엄 사태를 맞은 소감을 물었다.
▷3일 밤 사람들이 계엄의 주동자들과 이를 저지하는 국회의원들의 긴박한 움직임을 쫓는 동안 작가는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화면에서 서로 뒤엉켜버린 군경과 시민들에 주목했다. “맨손으로 무장한 군인들을 껴안으며 제지하려는 모습”에서 “진심과 용기가 느껴졌다”고 했다. 작가의 시선은 명령과 양심 사이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젊은 제복들에게도 닿았다. “명령을 내린 사람 입장에서는 소극적이었겠지만 보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적극적인 행위였다.”
▷작가는 7일 한림원 강연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들려줬다. ‘소년이 온다’를 쓰려고 1980년 광주를 취재하며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신뢰”를 잃어가던 즈음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적극적인 행위자’를 자료 속에서 만났다고 했다. 계엄군이 들이닥칠 줄 알면서도 광주 시민들 곁을 지키다 살해된 젊은 야학 교사도 그중 한 명인데 그는 마지막 밤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한강의 강연 주제는 ‘빛과 실’이다. 여덟 살 때 볼펜 깍지에 몽당연필을 끼워 쓴 시에서 따왔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사랑이란 무얼까?/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인간은 언어라는 실로 연결돼 있고, 그 실에 생명의 빛이 흐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영국 시인 존 던의 “인간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와 나란히 오래도록 기억될 ‘빛과 실’이다. 잔혹해지고 뒷걸음치려는 순간 서로 연결된 실에 각성의 전류를 흘려보내며 인류애를 지켜내자는 선언 같다.
▷한강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는 것은 폭력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맹세”라고 한 적이 있다. 한림원 강연에선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한다’고 표현했다. 3일 밤의 ‘적극적 행위자’들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우리를 돕고 구할 것이다. ‘광주의 5월’이라는 비극, ‘서울의 밤’이라는 희극으로 되풀이되는 역사가 보여준 퇴행적 정치의 한계, 진창에서도 희망을 건져 올리는 문학의 힘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한강 주간’ ‘계엄령 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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