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로 흥하고 정보로 쇠한 ‘금융 왕조’ 로스차일드家[이준일의 세상을 바꾼 금융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9일 22시 57분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이준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 교수
지지부진한 국내 주식 시장을 떠나 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들이 급증한 한 해였다. 스마트폰으로 해외 주식을 손쉽게 거래할 수 있기에, 자본은 한국을 넘어 미국, 일본, 중국, 베트남 등 전 세계를 광속으로 이동한다. 국경 없는 자본의 흐름이 손바닥 위에서 구현되고 있다.

사실 국제적인 금융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최대의 금융 가문이었다. 유럽의 군주들과 귀족은 물론이고 국가마저 로스차일드의 자금력에 기대었으며, 오늘날에도 은행, 부동산, 광물 기업, 와이너리 등 막대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 왕조의 설립자인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는 독일의 부유한 헤센 가문의 후계자 빌헬름의 자금을 관리하며 성장했다. 메이어는 다섯 아들을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로 보내 국제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가문의 신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했다.

로스차일드의 성장은 위기의 시기에 두드러졌다. 19세기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 크림 전쟁, 프로이센 전쟁 등 끊임없는 갈등의 시기였고, 각국 정부와 왕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금 대출, 국채 발행 및 유통, 외환 거래, 전시 물자 유통 등으로 부를 쌓았다.

특히 영국에 있던 셋째 아들 네이선의 과감한 행보가 핵심이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영국과 유럽 간 무역을 중지시키는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중심지이며 광활한 식민지를 갖고 있던 영국의 상품이 유럽 대륙에 전해지지 않자, 유럽도 물자 부족 및 물가 상승 피해를 입게 되었고 점차 프랑스를 등지게 되었다. 네이선은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영국 물건을 몰래 실어 날라 대륙의 로스차일드 형제에게 처분하도록 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전비가 바닥난 영국과 연합군에 자금을 지원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으니,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폴레옹 몰락의 한 축이 된 셈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비결은 정보였다. 형제들은 유럽 주요 도시에 자리 잡고 권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정보원을 구축하는 한편 빠른 통신 및 교통 수단에 투자해 유럽 전역의 정보를 누구보다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획득했다.

영국의 번성으로 런던이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베어링 가문을 제치고 최고의 금융 가문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부상과 뉴욕으로의 경제 중심 이동은 로스차일드 가문에 도전이 되었다.

로스차일드의 쇠퇴도 결국 정보 문제였다. 이들은 떠오르는 신흥 중심지 뉴욕에 직접 진출하지 않고 오거스트 벨몬트를 대리인으로 하여 사업을 운영했다. 벨몬트는 뛰어난 금융인이었지만 자율성이 커지면서 점차 가문과 거리가 벌어졌다. 특히 남북전쟁에서 그는 북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유럽 본사의 결정에 따라 중립을 취하게 되었고, 이는 전쟁 이후 주도권 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되었다. 정보로 성공한 로스차일드였지만 정보와 네트워크의 약화로 영향력이 축소된 것이다.

국내 정치와 경제는 혼란하고 세계는 대격변인 상황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와 판단이다. 국가의 정보시스템인 외교를 더욱 중시해야 하고, 기업들도 정보 수집과 국제적 네트워크의 구축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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