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3일 선포된 후 5시간 반 만에 해제된 비상계엄은 역사상 가장 짧은 비상계엄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한국 정치사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의미심장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예전에 선포되었던 비상계엄들은 여순 사건부터 4·3, 한국전쟁, 4·19와 5·16, 나아가 6·3항쟁과 10월유신, 부마항쟁과 10·26, 그리고 5·18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한국 현대사의 주요 결절점들 그 자체이다. 계엄이 필수불가결한 국가비상사태였건 독재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것이었건, 지난 시대의 계엄은 거시적인 정치체제 수준의 위기와 대변환이 일어났던, 정확한 날짜를 특정할 수 있는 역사인 것이다.
이에 반해 지난주 비상계엄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생활형 계엄’이라 할 만하다. 대통령의 계엄선포 대국민 담화를 보면 정말 눈물겹게 짠하다. 국회의 예산 삭감 때문에 아이 돌봄 수당과 청년 일자리, 심해 가스전 개발 사업을 못 하게 되었다는 불평이 알알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덤으로 계엄포고령을 보면 의료인들을 강제로라도 복귀시키는 것이 계엄의 공식 어젠다 중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계엄(戒嚴)이라는 단어는 사실 “군(軍)의 지배(Martial Law)”를 근엄하게 엄폐한 번역어이다. 본질적으로 군대가 민간으로 들어오는 일, 그것은 평시의 공권력으로 통치할 수 없는 상황을 맞아 최후의 수단으로 정부가 군의 폭력을 빌리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대통령은 국회와의 예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회로 헬리콥터와 병력을 보낸 것이다.
모든 현대 정부의 일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시민들이 매일매일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일상을 돕는 일(시스템 1)과 공동체 외부의 적으로부터 구성원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시스템 2)이 그것이다. 전자가 합의와 거래에 기반한 교환가치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면 후자는 국가가 독점한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절대적 가치의 세계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나에게 좋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양자가 명백하게 구분이 되고, 후자는 존재하지만 선량한 시민들의 시야에는 보이지도 않는 국가의 질서라 하겠다. 예컨대,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은 계엄이나 국가 폭력이 자제되었기 때문, 혹은 시스템 2가 작동을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의 큰 죄과는 45년 전 마지막으로 행사된 대통령의 계엄권이라는 ‘신기한 기능’을 한 번 사용해 봄으로써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순식간에 수십 년 후퇴시킨 것에 있다. 군사반란과 연이은 독재정권의 주역으로서 오명을 씻어내고 민주화 이후 문민통제의 전통을 세워나가던 우리 군과 사회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대통령의 죄가 가볍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정법상의 죄는 차치하더라도 역사를 되돌린 죄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더 큰 죄과는 ‘생활형 계엄’을 통해서 시스템 1의 문제를 시스템 2와 뒤섞은 것, 즉 교환가치의 체계를 국가 폭력으로 공격했고, 이 공격이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정부 예산을 국회가 삭감하는, 어느 나라에서나 매년 일어나는 통상적인 갈등을 “내란”이라고 부름으로써 물리적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 대통령이 정부를 대표해 국회에 예산을 설명할 시정연설의 기회를 포기한 것을 상기하면, 그리고 그 물리적 공격을 자유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정당화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을 쿠데타라 부르건, 시장질서 교란이라고 부르건 그 책임은 영원히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대통령의 거취와 관련된 논의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당장 던져야 할 질문은 ‘질서 있는 퇴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스템 2의 통제권을 누가 쥐고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책임총리가 시스템 1을 운영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더라도 시스템 2의 방아쇠를―만약 우리가 핵보유국이라면 핵가방에 해당하는 방아쇠를―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은 적이 없는 그 누가 맡는 것은 불가능하며, 대통령이 군통수권을 자의적으로 ‘이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그 방아쇠를, 이미 “경고를 위해” 한 번 당겨 본 대통령에게 계속 맡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동체로서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매우 위중한 만큼 오히려 답은 단순한 것 같다. 대통령이 군통수권과 경찰지휘권을, 공무원 인사권을 지닌 채 우리 공동체의 안전을 계속해서 책임지는 상황을 용납할 수 있는가. 그 일을 국민의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다른 이가 자의적으로 맡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혹은 다가올지도 모를 선거에서의 유불리를 따져서 그 애매한 헌정 위기의 어두운 터널을 연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
그 답은 아마 지난 주말 얼어붙은 여의도를 가득 채웠던 우리 젊은 시민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발랄하고 흥겨운, K팝 공연 같은 시위문화를 방송에서 지겹도록 보도했지만, 이들에게 이런 공화국을 물려줄 생각에 나는 그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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