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년 12월 12일 통일신라 마지막 왕, 백성 살리려 내린 결단[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11일 23시 00분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초상. 동아일보DB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초상. 동아일보DB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신라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첫 위기는 자연 현상으로부터 왔다. 헌덕왕 때 여름에 눈이 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었고 이로부터 천연두라는 역병이 유행하며 사회를 피폐화시켰다.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신라는 백성은 안중에도 없이 권력 다툼에만 골몰했다. 역병으로 지방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가혹한 세금을 거두려고만 했다.

진성여왕(재위 887∼897년) 때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정은 이들을 탄압하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는 김씨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효공왕에게는 김효종과 박경휘라는 사위가 있었는데 김효종이 밀려나고 박경휘가 왕위에 올랐다.

박씨 왕조는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으로 이어지는데 경명왕은 궁예를 내쫓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만 매달리는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다. 박씨 왕조의 잘못된 선택으로 각 지방의 세력가들은 신라에 대한 충성을 거둬들이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갔다. 경명왕 때 후백제는 대야성을 점령하여 언제든지 서라벌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데도 신라는 가까운 곳의 후백제는 무시하고 먼 곳의 고려와 동맹을 체결했다. 후백제의 견훤이 서라벌로 쳐들어오자 경애왕은 부랴부랴 고려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원군이 도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견훤은 경애왕을 살해하고 서라벌을 쑥밭으로 만든 뒤에 김효종의 아들 김부를 왕에 앉혔다. 그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이때 신라는 영토를 대부분 상실해서 이미 국가라 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주변에서 식량을 보급받지 못하면 서라벌의 백성들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경순왕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태자는 멸망하더라도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순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립되어 위태로우니 세력을 보전할 수가 없다. 강해질 방법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의 간과 뇌가 땅에 널리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싸울 군사와 병기는커녕 먹을 식량도 없는데 백성들을 전쟁으로 끌고 가면 벌어질 비극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켜야 할 무엇이 경순왕에게 있었을까? 이미 신라는 혜공왕(재위 765∼780년) 시절부터 권력 다툼으로 100여 년을 보냈고 진성여왕 때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해 각처의 반란으로 무너졌다. 신라는 국가의 존재 이유인 백성을 보호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음력 935년 12월 12일 고려는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당시의 상황은 일제가 조선을 잡아먹은 것과 같이 식민지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로지 왕이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음으로써 백성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신라는 경제를 잘 운영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 못했고 그것이 그들이 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경순왕은 남에 의해서 갑자기 오른 왕위를 아낌없이 포기함으로써 자신도 지키고 백성들도 살릴 수 있었다.

경제가 어려운 시기다. 소비심리는 냉각되었고 내수시장과 해외시장이 모두 어렵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을 동원한 비상계엄 때문에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왕좌를 버린 경순왕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라#멸망#경순왕#백성#경제#비상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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