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 입교부터 40년가량을 군에 몸담았던 예비역 군인으로서 송구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1985년 육사 생활을 시작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선 시위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정복을 입고 주말 외출을 나갈 때는 시민들 시선이 따가웠다. 그 세월을 견디고 나니 어느 순간 국민은 군인들의 묵묵한 헌신을 존중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12·3 비상계엄’으로 45년간 대한민국 군인들이 지켜왔던 군의 정치적 중립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번 계엄은 대통령과 운명공동체가 되어 대통령에게만 사활을 걸어온 소수의 권력자가 군을 정치에 이용한 사건이다. 역사의식도, 헌법적 소양도, 판단력과 소신도 없는 극소수 무능한 장군들로 인해 임무에 충실하던 대다수 군인이 어처구니없이 연루된 사건이다. 군을 정치에 이용한 세력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군을 정치에 이용한 세력에 큰 분노
과거 역사적 단죄를 받았던 일에 왜 우리 군대가 또다시 개입하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최근 심화된 군의 정치화 현상이 원인으로 보인다. 정치의 지나친 인사 관여, 반복되는 전직 국방장관 수사 등은 군인들이 전쟁이 아닌 정치의 틀로 세상을 보게 만들었다. 견제받지 않는 군 인사권도 문제다. 군 인사가 정권 편 가르기, 지연, 학연, 근무연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능력과 상관없이 우리 편, 충성심 기준으로 진급시키면 위법적 명령에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절대 보은’ 관계가 된다.
군인은 육사를 비롯한 사관학교 등 교육기관에서부터 위법한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우리 군 의식 저변에는 전투 효율성 차원에서 ‘항명’보다는 ‘복종’에 따른 이익이 더 크다는 인식이 강한 것이 현실이다. 전투 상황에서 복종과 항명은 오랜 논쟁 주제다. 고위 장교들만큼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 즉 위헌·위법적 상황을 더 신속하고 냉정하게 판단했어야 했다.
2024년에 계엄이 선포된다고 하면 괴담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괴담이 현실이 됐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맞닥뜨린 군은 어떻게 상황을 풀어나가야 할까. 군의 신속한 안정이 긴요하다. 계엄 연루자들은 현직에서 즉시 분리해야 한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른 시간 내에 국방장관을 포함해 새로운 지휘체계를 갖춰야 한다. 야전 장병들은 각자 위치에서 여느 때처럼 지휘관이 솔선하고 인화단결된 가운데 대비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훈련 등 본연의 임무에 더 매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국민들이 매섭게 지켜보고 있다.
문민 국방장관으로 군 통제 강화해야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인사 시스템 혁신이 필요하다. 문민 장관을 포함해 문민 통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과 장관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인사 권한을 견제하는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미군은 장군 진급자 전원에 대한 상원 승인제도와 4성 장군 의회 청문회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일부 보완해 적용할 필요가 있다. 군내에서 특정 집단이 독점적 위치를 갖는 것도 해소해야 한다. 국군방첩사령부는 축소하는 방향의 개혁이 필요하다. 헌법적 가치 교육이 대폭 확대돼야 한다. 육사 교육도 혁신돼야 한다. 학교장을 민간인으로 임명하고 임기를 보장해 육사 교육과정의 정권 관여를 차단하고 자율성을 확대해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일부 후배는 자기 위치에서 나름 지혜롭게 역할을 했다.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계엄의 아픔을 딛고 우리가 재건해야 군대는 깨어 있는 민주시민 의식으로 무장되고 ‘정치의 시각 대신 전쟁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진정한 국민의 군대였으면 한다. 밉겠지만, 못미덥겠지만 그럴수록 국민의 회초리와 더불어 사랑과 응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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