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처음 맞는 연말은 여러 감정이 맞물리는 시기이다. 퇴직 전에는 한 해를 정리하며 동료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면, 이제는 다르다. 직장이라는 소속감이 사라진 뒤의 연말은 기댈 곳 없는 척박한 광야와도 같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답답한 현실에서 다가오는 새해가 두려웠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퇴직 후 삶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한 시점이었다. 희망찬 회사 밖 미래를 꿈꾸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워야 했다.
첫째, 재무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맨 처음 할 일은 현재의 재정 상황을 확인하는 일이다. 퇴직금을 포함해 내가 가진 돈이 향후 몇 년간의 생계를 감당할 수 있을지 파악하는 것이 그 시작이다. 부족하다면 추가적인 수입 활동을 구상하거나 소비 패턴을 분석해 씀씀이를 줄이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퇴직자에게 가장 큰 걱정인 건강보험료는 임의계속가입 제도를 신청하거나 보유 재산 및 고가 차량 처분 등을 통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가깝게는 기부금이나 의료비와 같은 연말정산 시 세제 혜택이 있는 항목의 증빙을 모으는 것도 도움이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시급한 사항은 빚을 없애는 것이다. 은행 대출, 카드 대금, 혹은 다른 채무 현황을 파악하여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 빚을 그냥 놔두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노후가 불안해진다.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이자율이 높은 부채부터 갚아 나가도 좋다. 안 그래도 근심 많은 퇴직자에게 매달 조여오는 상환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은 삶의 질을 결정하는 위협적인 요소이다.
둘째, 배움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퇴직을 해보니 이전의 커리어를 살리기란 정말 어렵다. 급변하는 세상에 내 자리를 마련하려면 자기계발이 선행돼야 한다. 정보기술(IT) 활용 능력, 자격증 취득 등 각자의 관심과 환경에 맞는 구체적인 학습 로드맵을 세워 차근차근 배워 나가 보자. 국민내일배움카드와 같은 국가 지원 제도나 지역별로 운영되는 중장년 재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권할 만한 방법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과거 한 분야의 전문가였다는 생각은 버려야 된다. 지난 경력과 성과는 확실히 값지지만, 그것만으로 내일을 보장받기에는 사회가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나의 모습을 한 가지로 규정하지 말고 다채롭게 변화하려는 유연한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인생 여정을 위해서는 낡은 틀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셋째, 운동을 해야 한다. 회사를 떠나면 일과가 불규칙해지고 신체 활동이 줄어들어 건강을 지키기가 힘들어진다. 퇴직 후 생활에 있어 운동은 단순히 신체적 단련을 넘어 건전한 루틴의 중심축이다. 운동은 하루를 규칙적으로 관리해 주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스트레스도 줄여 준다. 퇴직자에게 건강은 대단히 귀중한 자산이다. 체력이 뒷받침돼야 경제 활동도 할 수 있고 불필요한 병원비 지출도 막을 수 있다.
어떤 것이든 괜찮다. 걷기도 훌륭한 운동이다. 집에서 우두커니 있기보다 밖으로 나가면 기분도 상쾌해지고 활력도 되살아난다. 매일 아침 10분씩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만으로도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집 근처 스포츠 동호회에 가입해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유익하다. 회사를 떠나고 느끼기 쉬운 고립감을 해소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나는 퇴직한 뒤의 첫 연말을 타지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보냈다. 앞날에 대해 계획하긴 했지만 대부분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 치밀하지도 못했던 데다 한쪽으로 편중된 탓에 이후 적잖이 고생하였다.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졌고 돈이 줄줄 새는 것도 막지 못했다. 많은 것을 잃고 나서야 퇴직 후에는 최소한 건강과 재무, 활동의 세 측면이 조화롭게 갖춰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얼마 전 만난 한 퇴직자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최고로 부러운 사람은 직장 내에서 높은 직급까지 올랐다가 나온 이도, 초고가 아파트에 살며 여유롭게 지내는 이도 아니라고 말이다. 큰돈은 안 되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건강한 몸으로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고백했다. 화려한 타이틀이나 커다란 부가 없어도 자신이 선택한 삶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승자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회사를 떠난 뒤의 첫 연말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잇는 연결 통로와도 같다. 두렵겠지만 미루지 말고 첫발을 내디뎌 보시길 바란다. 아직은 작은 날갯짓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의 힘이 더해지면 분명 원하는 고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