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된 책은 단연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일 것이다. 독자들의 소감을 찾아 보면 제각각의 해석들이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비난도, 작가에 대한 비난도 보게 된다. 나 역시 책을 통해 많은 생각이 들었고, 문학에 조예가 깊지 않기에 작가의 메시지 중 일부만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현병을 앓는 주인공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라는 직업상 눈에 더 크게 비치는 부분이 있어, 이를 다른 이들과 공유하려 한다. 왜냐하면 이는 그저 책 속의 희한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언제든 우리 자신의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현병 발병률은 전 세계 동일하게 1% 정도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정부가 집계한 중증 정신질환 진단 혹은 치료 이력이 있는 사람의 수가 63만 명 이상으로 나타났다. 진단받지 않았을 수많은 환자들과 그 가족들까지 고려한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적 문제이다.
급작스럽게 채식을 선언한다 해서 조현병 진단에 해당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영혜 씨의 경우에는 그 외 다른 변화들도 동반됐다. 매일 악몽을 꾸며 심한 불면을 겪었고, 급격한 체중 감소도 있었으며, 냄새에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남편의 고기 섭취를 견딜 수 없었다. 또한 중요한 모임에서 대화는 일절 없이 상대방들이 불편하도록 식사 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등 사회성이 명백히 저하된 모습을 보인다.
그럼에도 환각이나 망상, 와해된 행동이나 언어 등 조현병의 핵심 증상들은 없고, 명확하게 해당되는 진단도 따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는 정신과 의사들이라면 이러한 변화들이 조현병의 전구기라고 부르는, 아직 본격적 증상이 나타나진 않았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들임을 알아챌 수 있다. 이 전구기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급작스럽게 철학이나 종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이전에 없던 피해의식을 호소하기도 한다. 이때 최대한 빠르게 치료가 시작된다면 조현병으로 진행하는 것을 막거나, 혹은 발병하더라도 더 좋은 예후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이상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채식주의자 역시 그렇게 현실적 흐름대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의 상태가 진심으로 의심스러웠다 해도 흔히 말하는 상담이나 치료 따위를 고려하고 싶지 않았다.’ 책에 나오는 영혜 남편의 독백이다. 내 가족에게 정신질환이 생겼을 수 있다는 생각은 분명 공포스럽다. 정신질환과 그 치료법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그 공포심을 더 키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저 최대한 눈을 감고 회피한 채 치료에 가장 중요한 그 시간을 흘려 보낸다.
정신과 치료의 무력함과 한계도 노골적으로 등장하지만, 그래도 ‘채식주의자’가 널리 읽히는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매우 반가운 일이다. 2007년 이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와는 다르게 정신과에 대한 편견이 많이 줄어든 요즘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치료 시기를 놓친 채 인생이 무너지는 수많은 영혜들이 여전히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지용 연세웰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2017년 팟캐스트를 시작으로 2019년 1월부터 유튜브 채널 ‘정신과의사 뇌부자들’을 개설해 정신건강 정보를 소개하고 있다. 11월 기준 채널의 구독자 수는 약 23만 명이다. 에세이 ‘빈틈의 위로’의 저자이기도 하다.
김 원장의 ‘정신과의사가 분석하는 채식주의자 주인공 심리’(https://youtu.be/MZIudMtnzuU?si=xri6DWYFZJV0ql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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