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똑똑했는데…” 이 말이 아이를 망칩니다[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2월 15일 23시 00분


〈215〉 ‘영재’ 소리 들었던 아이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한 엄마가 찾아왔다. 아이가 어릴 적에는 굉장히 똑똑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니 수업을 너무 버거워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이의 어떤 면을 보고 똑똑하다고 느꼈냐고 물었다. 아이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기가 막히게 잘 다뤘다. 한글도 안 가르쳤는데 간판도 빨리 읽었고, 어른하고 대화가 될 정도로 말도 잘했단다. 3세인가 4세 때는 알파벳도 줄줄 읽고, 한자도 꽤 많이 알아서 아이가 영재가 아닌가 싶었단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유아기 산만한 아이들은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어 때로는 창의적으로 보인다. 똑똑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그런데 집단으로 들어가 체계적인 공부가 시작되면 참여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똑똑하지 않은 아이가 되고 만다. 불안하고 예민한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는 곧잘 하다가도 집단 안에서는 제대로 못 따라간다. 불안하고 예민한 탓에 자극이 많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언어가 늦은 아이들 중에는 기계를 잘 다루는 아이가 있다. 이 아이들은 퍼즐이나 블록 같은 것을 제 나이 수준보다 잘한다. 부모들은 아이의 비상한 능력을 보고 영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단체생활을 시작하면 언어 때문에 다른 발달이 더뎌진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똑똑하지 않은 아이가 되어버린다.

“영재인 줄 알았는데 너무 평범해졌어요”라고 말하는 부모들에게 나는 되묻는다. “영재가 되면 좋겠어요?” 부모들은 조금 당황하며 “아니,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부모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아이가 영재여도, 영재가 아니어도 양육의 큰 지침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영재’ 소리를 자주 들었다면 그 부분에서는 우수한 것일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유난히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이 있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고, 언어를 빨리 배우는 사람이 있고, 수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 있다. 아이도 그런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한 영역에서 우수할 때, 부모는 자칫 함정에 빠진다. 그 영역을 더 우수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영역으로만 편향된 강화가 일어난다.

영재이든 영재가 아니든, 부모는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데 더 신경을 써서 키워야 한다. 아이가 말은 굉장히 잘하는데 움직임이 너무 둔하다. 운동을 잘하게 할 것까지는 없지만, 몸을 많이 움직이는 활동 쪽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아이가 수학 능력이 매우 뛰어난데, 사회성이 많이 떨어진다. 그 부분을 어떻게 보완해줘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가 잘하는 것에 너무 취하면 안 된다. 계속 그쪽만 발달시키면 다른 부족한 영역의 발달은 더 떨어진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유한하다. 자신의 에너지를 배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잘하는 영역의 발달에 시간을 지나치게 할애하면 부족한 영역의 발달은 시간이 더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영역의 기능은 다 중요하다. 서로서로 뒷받침하고 있다. 어느 정도 균형 있게 발달하지 않으면 한 부분이 우수해도 다른 부분이 받쳐주지 못한다. 다른 영역의 기능까지 우수하게 끌어올리라는 것이 아니다. 평균치 정도는 올라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이가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아이가 단단하게 자신의 좋은 능력을 발휘하고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사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떠한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 막연하게 공부를 잘할 거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특출나다’ 내지는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그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다. 하지만 유아기 부모가 아이를 똑똑하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한 암기나 빠른 언어 발달, 빠른 조작 능력 등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단체생활에서 공부를 잘하는 똑똑함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부모가 “아이가 어렸을 때는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라며 한숨을 쉴 때,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 아이의 마음이다. 아마 부모는 무의식중에 “너 어릴 때 참 똑똑했는데…”라는 말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말은 아무래도 부정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다. 아이 입장에서는 핀잔이 섞이는 느낌이고, ‘넌 지금은 별로야’라는 무시로 들릴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신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이의 자신감은 당연히 떨어진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난 참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이런 면은 좀 잘났지, 우리 부모는 언제나 나를 믿고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아이가 영재이든 영재가 아니든 양육은 똑같다. 똑똑했던 예전의 내 아이를 그리워하면서, 안타까운 눈으로 지금의 아이를 바라보지 말았으면 한다. 반짝반짝 빛났던 아이는 사실 지금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부모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어 그 반짝임을 보지 못할 뿐이다.

#영재#아이#오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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